여행 3일 차 / 진정한 고수는 침묵을 지키는 법이지
버스 창밖으로 세어 들어오는 햇빛,
여기는 어디일까?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허리를 양 옆으로 비틀며 찌뿌둥한 몸을 풀어봅니다. 옆사람에게 최대한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팔꿈치를 옆구리에 붙이고 작은 동작으로. 입 밖으로 터져 나올 것만 같은 소리를 입을 다물어 묵음 처리합니다. 어제의 급박했던 일들이 머나먼 과거처럼 느껴지네요. 피곤했는지 버스를 타고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잠에 들었지만, 꿈처럼 기억나는 순간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중간에 버스가 한번 정차했던 때입니다.
'잘됐다. 화장실에 다녀와서 푹 자야지.' 힘겹게 몸을 일으켜 휴게소에 가려는 대열에 합류합니다. 그런데 내리는 사람들에게 기사님이 무엇을 나눠주더라고요. 저 역시 얼떨결에 그것을 받고 나서 뭔지 확인해 보니 '작은 1회용 칫솔과 치약?' 양치질을 하고 개운하게 자라는 배려인가요? 여행을 많이 다녀봤지만 버스에서 칫솔과 치약을 주는 곳은 처음이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다른 사람들 틈에 끼여 화장실 외부에 있는 세면대 앞에서 양치질을 하고 있더라고요. 칫솔이 워낙 작고, 칫솔모도 너무 딱딱해 잠이 확 달아났습니다. 화장실에 다녀와서 푹 자려던 저의 계획은 실패입니다.
그래도 이 일화가 꿈처럼 기억나는 걸 보니 다시 잠이 잘 들었던 거 같아요. 핸드폰을 확인하니 출발한 지 약 9시간이 지나 있었습니다. 아침 6시가 됐을까요? 드디어 바간 터미널에 도착했습니다. 어차피 너무 이른 시간이라 지금 가면 숙소 체크인도 안돼서 만약 이른 시간에 도착한다면 도착하자마자 택시를 타고 일출을 보러 가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일출시간은 이미 지나버렸습니다. 하는 수 없이 숙소로 바로 발걸음을 돌리려는 순간 어떻게 알았는지 택시기사님들이 닦달같이 달려드는 거 아니겠어요? 멀리서 '쟤네 뭐 하나' 지켜보다가 '쟤네 숙소 간데!'라며 알아차린 거처럼 말이에요. 웬만하면 택시를 타려고 했지만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에 저는 툭툭을 타기로 했습니다. 숙소까지는 약 15분.
작은 툭툭이 한쪽에 큰 배낭을 거치시키고, 한 손을 배낭에 올린 뒤 핸드폰으로 숙소 위치를 기사님께 공유합니다. 'OK' 사인과 함께 툭툭이는 흙먼지와 시원한 바람을 적절히 섞어 날리며 목적지를 향해 달립니다. 그리곤 얼마 가지 않아 멈춰 선 툭툭이. '무슨 일이지?' 알고 보니 바간에 방문하려면 도시세를 내야 된다고 하더라고요. 가격은 25,000짯, 한국돈으로 거의 20,000원 돈 하는 가격입니다. 도시세치곤 생각보다 비싼 금액인데 이 비용으로 바간이라는 아름다운 도시를 보존하고 지키는 것이니 그거에 일조했다고 생각해 봅니다. 그렇게 무사히 숙소에 도착했습니다.
체크인 전 간단하게 샤워가 가능하다고 하여 그새 쌓인 흙먼지를 시원하게 개워봅니다. 바간에서 지낼 동안 이 흙먼지와 익숙해져야 합니다. 샤워 후 숙소 로비로 나오는 순간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여전히 물기가 남아있는 몸에 닿으니 기분이 좋습니다. 자연스럽게 배가 고파오는 건 자연의 섭리. 짐을 맡기고 숙소 근처인 '낭우'라는 지역에 저렴한 미얀마 현지식당이 있다고 하기에 한번 가보기로 합니다. 마침 숙소에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자전거가 있더군요. 여행을 가서 자전거를 타면 그렇게 기분이 좋아요.
자전거를 타며 식당으로 가는 동안 바간이라는 도시가 대충 어떤 느낌인지 파악합니다. 도시 색감은 황토색 풍의 그을린 느낌이었고, 이를 보완하고자 도로 양 옆으로는 가로수들이 빼곡히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차는 거의 없고, 대부분 자전거 아니면 E-bike를 타는 사람이 많이 보였습니다. 굉장히 이국적인 모습이에요. 식당까지는 약 15분. 식당이름은 '퍼펙트 식당' 얼마나 완벽하길래 식당이름을 퍼펙트라고 지었을지 기대가 됩니다. 식당에는 아침을 해결하는 현지분들이 많이 계셨습니다. 여행에서 현지식을 선호하는 저로서 최고의 식당이 아닐까 합니다. 일단 첫인상은 '퍼펙트!'
메뉴판을 보니 가격도 정말 저렴하네요. 볶음밥이 1,000짯이고 대부분 음식이 3,000짯을 넘지 않더라고요. 볶음밥이랑 누들요리를 주문합니다. 주문한 음식과 함께 고추와 통마늘 등장. 우리나라의 김치역할을 하는 녀석들인 거 같네요. 낯선 곳에서 익숙한 전래동화인 '마늘 먹고 사람 되는 곰' 이야기가 생각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쨌든 너무 만족스러운 식사였습니다.
숙소로 돌아와 E-bike는 필수라는 걸 깨닫습니다. 마침 숙소 앞에 E-bike 대여점이 있더군요. 1일에 6,000짯. 저녁 7시까지 반납. 평생 살면서 자전거만 타봤지 바이크는 처음이라 감각이 익숙해지는데 시간이 걸렸습니다. 생각보다 무겁고 밸런스를 잡는 게 어렵더라고요. 속도를 내지 않고 천천히 바간 흙길을 달렸습니다. 익숙해지니 생각보다 재밌더라고요. 전기로 움직이는 바이크지만 속력도 나고, 자전거처럼 힘들지도 않으니 탈만 했습니다. 바간에서는 사원을 보호하기 위해 자동차보다는 자전거나 E-bike를 더 많이 이용합니다. 법으로 정해져 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정해져 있지 않은데 이렇게 이용하는 걸 보면 시민의식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지요. 막상 E-biike를 이용하니 바간에서 생활하는 데는 이게 더 경제적이고 편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바간은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곳입니다. 그 이유가 바로 바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수많은 사원입니다. 세계 3대 불교 유적지라고 하네요. 바간에 왔으면 E-bike를 타고 사원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게 암묵적인 룰입니다. 저도 그 룰을 지켜보려고 합니다. 굳이 목적지를 정하는 것보다 이동하다가 마음에 드는 사원이 있으면 잠시 멈춰 둘러보고 가면 됩니다. 세월의 흔적으로 무너져 가는 사원도 있는 반면 여전히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원도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너무 굳건해서 권위적으로 보이는 사원들보다는 조금 인간적으로 보이는 사원들에게 마음이 가네요.
E-bike를 타며 요리조리 돌아보기만 했는데도 물놀이 후 처럼 배가 고프네요. 점심은 유명한 버거를 먹으러 갑니다. 이곳은 아침을 먹었던 식당과 달리 관광객들에게 맞춰져 있는 식당이었습니다. 간만에 여행 분위기 좀 내겠는데요? 수제버거와 아보카도 샐러드가 기가 막히더라고요. 특히 아보카도를 우리나라에서 먹으려면 비싼데 여기는 가격도 저렴한 데다 크기도 커서 아주 마음에 들었습니다. 예상컨대 또 오게 될 거 같습니다.
자 이번에는 목적지를 정하고 가볼까요? 무려 1105년에 지어진 바간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불교사원인 '아난다 사원'을 방문해 볼까 합니다. 양곤의 쉐다곤처럼 양말까지 벗지는 않지만 모든 사원에 들어갈 때는 신발은 벗어야 합니다. 반바지도 안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요. 쉐다곤은 황금으로 뒤덮인 화려하고 웅장한 느낌이 들었다면, 아난다 사원에 들어가는 순간에는 사원 전체가 하얀색 배경에 뭔가 고요하고 차분한, 편안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사색하기 너무 좋은 곳인 거 같습니다. '내 마음이 저절로 비워지는 듯한 느낌.'
약간 남인도 느낌의 사원들과도 비슷해 보였습니다. 다양한 나라들의 불교양식이 조금씩 섞여 신비로운 분위기가 물씬 연출되더라고요. 하얀 배경색이 주는 편안함, 좌우 대칭구조가 주는 안정감. 그리고 중간중간 포인트로 보이는 작고 화려한 색감들. 모든 것이 완벽했습니다.
오늘의 마무리는 일몰 뷰 포인트로 유명한 난민타워에서 할까 합니다. 바간에서 가장 높은 전망대인 만큼 다른 사원들 틈에 끼여 있어도 어디서나 보이더군요. 지도를 찾아볼 필요도 없이 곧장 이동합니다. E-bike를 주차하고 입장료를 구입합니다. 입장료는 10,000짯 정도 되는데 미얀마 물가치고는 약간 비싸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생각해 보니 바간의 전체적인 입장료가 조금 비싼 편인 거 같습니다. 어느새 바간의 하늘이 붉게 물들고 있었습니다. 시간에 맞춰서 잘 온 거 같습니다. 일몰을 보기 위해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네요. 사람들 틈 사이로 까치발을 들고 빼꼼빼꼼 일몰을 훔쳐봅니다. 잠시 숨을 죽이고 드넓은 바간 지평선에 붉게 빛나는 일몰이 광선으로 변하며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봅니다. 낯선 여행지에서 바라보는 일몰은 언제나 아름답고 특별합니다.
오늘은 일몰로 하루를 마무리하고, 내일은 일출로 하루를 시작해 볼까 합니다. 호스텔에서 자체적으로 진행하는 일출투어가 있더군요. 일상에서는 해가 뜨고 진다는 사실을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면서 살아가는데 여행지에서는 해가 뜨는 시간을 찾아보기도 하고 간절히 해를 기다리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게 바로 여행 아닐까요? 너무나 당연해서 몰랐던 것들에 온 감각을 동원해 느끼는 이 경험. 평소에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들에 감사함을 느끼게 됩니다. 내일 꼭 밝게 빛나는 해를 볼 수 있길 기대하며 잠자리에 들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