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바간의 일몰헌팅

여행 5일 차 / 프라이빗의 의미가 이게 맞나?

by 떼오 Theo
일몰헌팅이란, 저녁시간이 다가오면 일몰을 볼 수 있는
파고다를 찾아 떠나는 사람들의 행위를 일컬어 부르는 말.
흡사 헌팅과 비슷하여 붙어진 말.


그렇습니다. 저는 현재 미얀마 바간에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아침부터 E-bike를 타며 흙먼지를 날립니다. 어떤 일출스팟을 갈지 궁금해하며 인솔자를 따라갑니다. 오늘 방문한 곳은 열기구가 더 잘 보이더군요. 이곳이 좋은 스팟이라는 것을 증명해주듯이 웨딩사진을 찍는 커플도 보입니다. 아침 일찍부터 대단합니다. 이게 사랑의 힘일까요? 아침 댓바람의 일출투어를 마치고 숙소에 들어와 잠깐 눈을 붙입니다. 오늘도 역시 어제와 다르지 않은 나만의 파고다를 찾아 떠나는 일정이겠지만, 그 안에서 또 어떤 새로운 일들이 일어날지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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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궁금증에 불을 지피듯 마음에 드는 사원을 찾아 해매던 중 한 청년을 만났습니다.

그 청년은 내가 무엇을 찾는지 알고 있는 듯 다가와 말을 건냅니다.


"내가 너 뭐 찾고 있는지 알아. 일몰을 볼만한 파고다를 찾고 있지?"


순간 움찔 했지만, 속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애써 태연한 척을 합니다. 그리곤 자연스럽게 대답합니다.

"이미 가려고 하는 곳이 있긴한데, 뭐... 알고 있는 곳 있어?"


"몇 곳을 가보았다면 알텐데 대부분의 파고다들이 잠겨 있을꺼야. 최근에 지진으로 인해 몇몇 파고다가 무너져 안전상의 이유로 대부분의 파고다들을 잠궈뒀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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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바간에 있는 사원들을 자유롭게 올라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제는 그게 어려워졌는데 이를 상업적인 목적으로 대가를 치르고 몰래 알려주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이 청년도 바로 그런 사람들중 한명 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원한다면 내가 괜찮은 파고다 알려줄게. 뷰가 아주 기가 막힌 시크릿 파고다 두 곳을 알고 있어."


분명히 돈을 요구할 것이라는 것을 알아 거절의 의사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그 청년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우선 돈은 필요없어. 하지만 나는 미술을 공부하고 있고 그림을 그리고 있어. 나중에 그림을 보고 괜찮으면 하나 사주면 돼!"


그 말을 듣고 마음이 흔들립니다. 바간을 돌아다니며 종종 그림을 파는 상인들을 본 적이 있는데 그림이 생각보다 이뻐서 기회가 된다면 사야겠다는 마음이 있었어요. 이번 기회에 그림도 사고, 시크릿 파고다에서 일몰도 볼 수 있다면 일석이조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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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가격은 둘째치고 우선 파고가를 가보자고 했습니다. 두곳을 방문했는데 첫 번째와 두 번째 파고다와는 거리가 조금 있었습니다. 길도 복잡했고, 따로 다시 찾아가기가 쉽지 않다고 생각해습니다. 그래서 현재 와있는 두 번째 파고다에서 일몰을 보기로 했습니다.


이제 그 청년과 숨막히는 흥정의 시간입니다. 파고다에서 내려오자마자 청년은 자신의 바이크 트렁크에서 두루마리 뭉치들을 꺼내더니 바닥에 짜-악 펼쳤습니다. 무슨 마법을 부리는 양 우리 앞에는 양탄자 위에 다양한 그림들이 전시되었습니다. 나름 진지하게 그림을 고르기 시작했습니다. 코끼리 등 동물을 그려놓은 그림도 있었고, 미얀마 전통의상을 입고 있는 사람들 그림도 있었지만, 바간의 사원들과 함께 해가 그려진 그림이 가장 마음에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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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을 가르키며 얼마냐고 묻자, 청년은 10,000짯을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 돈으로 10,000원이 조금 안되는 큰돈이었습니다. 생각보다 너무 비싸 조금 깎아보려고 했지만 오히려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나 미술공부하는 학생이야... 이 돈으로 그림공부를 해야 돼...' 라며 연민 필살기(?)를 쓰는거 아니겠어요? 마음이 약해진 저는 결국 사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래, 이 또한 좋은 경험인데, 이 과정을 돈으로 샀다고 생각하자.'


그런데 그림을 사고 있는 도중에 어디선가 계속 사람들이 오고 있는거 아니겠어요?

'아니, 여기 시크릿 파고다라며!!??'


이런 실랑이를 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먼저 올라가 자리를 차지하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림청년과 급하게 인사를 하고 다시 파고다로 올라갔습니다. 그림청년도 난감한 표정을 지었지만, 더 이상 알려지면 안되니 다른 사람들한테는 말하지 말라는 제스처까지 취하며 자리를 떴습니다. 이미 무의미해 보이긴 하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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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일몰냄새(?)를 맡았는지 사람들이 점점 몰리더군요. 이게 화근이었습니다. 파고다보안관(스스로 부여한 이름)이 와서 당장 내려오라는 것이었습니다. '10,000짯을 내고 알아낸 곳인데 이렇게 허무하게 내려오라고...?' 아쉬운 마음이 표정과 축 쳐진 행동으로 다 드러났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규칙은 규칙이니깐요. 결국 남은 일몰은 근처 무너진 벽돌 틈 사이에 앉아 감상했습니다. 오늘 있었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네요.


일몰헌팅은 이렇게 실패로 끝이 났지만 많은 이야기가 생긴 하루였습니다. E-bike를 타고 다니며 나만의 파고다를 찾는 단순한 하루의 반복이지만, 그 반복되는 행위 속에서 생겨나는 이야기는 그 어떤 여행지에서 보다 다채로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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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게 바간의 매력이 아닌가 싶습니다. 날리는 흙먼지들이 비록 무의미할 수도 있지만, 결국 나만의 파고다를 찾았을 때의 작은 기쁨. 살아간다는 것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생기는 작은 기쁨. 그 기쁨 때문에 우리는 무의미함도 감수하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거 같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작은 기쁨을 느끼기 위해서는 내 주변에 있는 것들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비록 무의미한 것들이라고 해도. 어렵지요.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그게 저희 인생인걸요. 그렇게 바간에서의 하루가 또 저물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