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너무 빨리 다가가고 너무 많이 사랑하는 사람들

by 이레 Ireh

“The wounds of our earliest attachments often echo in our closest relationships.” — Mary Ainsworth (Developmental psychologist)

“가장 처음의 애착 상처는, 우리가 가장 가까운 관계에서 되풀이되곤 한다.” — 메리 에인스워스 (발달심리학자)




20대 초반의 나는 사랑이라는 감정에 서툴면서도, 어떤 면에서는 능숙했다. 좋아하는 마음이 조금만 생겨도 그 마음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사람. 그게 바로 나였다. 다른 친구들이 사랑을 기다릴 때, 나는 상대에게 내 마음을, 있는 힘껏 표현하고 만나자고 해버리는 요즘 말로 하면 ‘테토’였다.


나는 쿨한 연애를 하고 싶었다. 아니, 내가 쿨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TV에 나오는 쿨한 여자 주인공을 보면 그렇게 멋져 보일 수가 없었다. 나는 TV 속 그녀처럼 말하고 싶었다.


“난 집착 안 해. 너도 네 인생이 있지. 나도 그렇고.”


이런 대사를 말하고 싶었다. 왠지 그때 당시에 유행했던 차가운 도시 여자 같은 느낌이어서, 나도 그렇게 하고 싶었다. 처음에는 진짜 그럴 자신도 있었다.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사랑하고, 내 리듬대로 지내고 싶었고, 실제로도 그렇게 했다. 초반에는.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쿨한 사람이었던 나는 어느새 질척이는 사람으로 변해갔다. 상대에게 좀 더 연락하고, 더 보고 싶어 하고, 이내 섭섭해하고, 상대의 일정을 하나하나 확인하고, 나를 끼워서 맞추는 질척질척한 여자가 되었다.


나는 버려지는 것이 무서웠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나는 그랬다. 그를 실망하게 할까, 작은 갈등이 생기면 이 관계가 망가질까 노심초사했다. 최대한 그에게 맞춰서 어떠한 갈등도 만들지 않고, 그를 실망하게 하지 않고, 우리 관계를 겉보기에 사랑스럽게 오래 유지하는 것이 나의 목표였다.


갈등이 생기면 이별이 금방이라도 찾아올 것 같아 잠을 잘 수 없었다. 정직하게 내 모습을 보이게 되면 그게 한편으로는 그가 나에게 질리게 될까 봐 무서웠다. 나는 나를 숨겼다. 내 감정은 억누르고 욕구는 뒤로 미루고, “나는 괜찮아, 난 아무렇지 않아”를 남발하는 사람이 되었다. 결국 쿨하고 싶었던 나는 사라졌다. 나는 상대의 분위기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불안해하고 흔들리는 사람이 되었다.


우리는 누군가를 좋아하면 그 사람에게 맞추려고 노력한다. 사랑이면 그 정도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맞추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면서 연애라는 것을 하고 관계라는 것을 맺으니까. 그것은 연인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다른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과도한 의존과 기대, 불안, 두려움이 쌓이면 상대에게 맞추는 힘겨운 일상을 보내게 된다.


나도 그랬다. 나는 그가 원하는 시간에 약속을 잡았다. 급작스럽게 바뀐 그의 일정에도 “괜찮아, 나 오늘 원래 할 일 없었어.”라고 말했다. 내가 바쁜 것은 미뤄두고 그에게 그렇게 하나하나 다 맞춰갔다. 그가 편한 시간을 중심으로 내 하루를 움직였다. 그가 좋아하는 카페에 가고, 그가 먹고 싶은 메뉴를 고르고, 그가 좋아하는 동네에서 늘 만났다. 나는 ‘괜찮아, 원래 나도 이런 분위기 좋아해.’라고 나를 설득하곤 했다.


연락도 그랬다. 그는 천천히 대답하는 사람이고, 나는 바로바로 답장하는 사람인데 어느 순간 나도 그의 속도에 맞추어 천천히 답하려고 했다. 쿨해 보이고 싶어서가 아니라 내가 더 좋아하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속도를 일부러 낮춘 거였다. 그렇게 하면서도 마음은 불안해서 몇 번이고 폰을 들었다 놨다 했다. 친구들은 그런 나를 보고 밀고 당긴다고 웃었지만, 정작 나는 그런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저 그가 나를 우습게 생각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맞추고, 양보하고, 상대의 기분을 먼저 살피며 지내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둘의 관계는 더 이상 둘의 관계가 아니게 된다. 상대는 가벼워지고, 단 한 사람이 모든 무게를 떠안고 있는 관계가 된다. 그럴 때 상대는 내가 무게에 깔려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른다. 정말 몰라서 모르는 경우도 있고, 내가 겉으로 괜찮아 보이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모르는 경우도 있다. 물론, 간혹가다 알면서도 모르는 체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런 사람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나쁜 남자, 나쁜 여자니까 논외로 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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