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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레네 Feb 25. 2022

카레 예찬

이국의 볕을 꿀떡꿀떡 삼키는 것만 같아요

기분이 저조할 때, 나는 청소를 한다. 쭈그려 앉아 물걸레질을 하고, 행주를 삶고, 락스로 욕실 타일이며 샤워장의 물 때를 뽀득뽀득 소리 날 때까지 닦는다. 그러고 나면 생활의 때뿐만 아니라 마음의 때도 벗겨낸 것 같아 상쾌한 기분이 든다. 그리고, 허기가 진다.


청소를 하느라 기운을 쏙 뺐으니 이럴 땐 간단하고 설거지 거리가 많이 나오지 않는 음식이 좋다. 게다가 묵혀두었던 식재료를 처치할 수 있는 음식이라면 냉장고 정리까지 되니 더욱 환영이다. 예를 들면, 카레가 그렇다.







카레는 쉽다. 채소와 고기 등을 송송 썰어 카레 가루 -나는 보통 큐브형 고체를 쓴다-에 팔팔 끓이면 금세 완성된다. 볶거나 데치거나 숙성시킬 필요 없이, 그저 원하는 크기로 재료만 손질하면 된다. 게다가 그 재료의 선택 또한 자유롭다. 나는 주로 그때그때 냉장고에 있는 자투리 채소를 활용하는데, 궁핍했던 유학생 시절엔 양파 하나만 넣고 만들기도 했고, 두부나 호박, 새우, 가지, 소시지, 시금치처럼 다소 의아할 수 있는 식재료도 종종 넣는다. 예상외로 카레는 다양한 식재료와 잘 어우러진다. 더 정확히는, 강한 향신료의 맛으로 다른 재료를 제압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카레는, 뭘 해도 카레다. 두부를 잔뜩 넣는다고 하여 두부 요리가 될 수 없고, 최상급 소고기를 넣는다 해도 결국 카레에 지나지 않는다.




이건 카레의 장점이자 치명적인 단점이기도 하다. 그 독특하고 강한 맛 때문에, 내용물을 뭘 넣었건 카레는 금방 물리는 편이다. 그리고 나 역시 그런 이유로 카레는 청소를 한 날에나 가끔 끓여 먹는다.




… 그러고 보면 나는 카레의 맛 자체를 좋아한다기보다 그렇게 우르르 재료를 쏟아 넣고 끓이는 과정이 좋은 건지도 모르겠다. 카레가 뭉근하게 끓는 걸 보고 있노라면 스트레스가 그 안에서 같이 폭폭 익어 뭉개지는 기분이 든다. 먼지를 닦고, 쓰레기를 버리고, 시들해져 가는 식재료를 해치우듯, 마음의 찌꺼기를 다 끄집어 내 숭덩숭덩 썰어 끓이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카레를 청소용(?)으로만 먹는 건 아니다. 가끔은 그 오묘한 향신료의 맛이 그리워 별식으로 카레를 만들기도 한다. 지난해 여름, 아는 선배가 우리 집에서 한 달간 머물렀을 때 가장 먼저 대접한 음식도 카레라이스였다. 물론, 정성이 조금 더 들어간 버전으로.




'정성 버전'의 카레는 우선 양파를 무지막지하게 많이 썰어 버터에 달달 볶는 것부터 시작한다. 팔이 내 것이 아니다 싶을 정도로 아플 때 즈음- 그러니까, 하얀색의 양파가 캐러멜 색으로 변하면, 별다른 양념 없이도 달큼하고 감칠맛이 난다. 그 후에 물을 추가하는데, 부드럽고 고소한 맛을 원하면 코코넛 우유나 생크림을 넣으면 좋다. 재료는 보통 냉장고에 있는 것을 활용하지만, 손님을 대접하기 위한 거라면 새우나 버섯, 토마토를 빼놓지 않는다. 아무튼 건더기가 다양해야 보기에도 좋고, 맛도 풍부해진다.




물론 플레이팅도 중요하다. 카레- 그것도 밥과 곁들여 먹을 땐 무조건 널찍한 그릇이 좋다. 판판하게 깐 밥 위에 절반 즈음 카레 이불을 덮어주면 보기에도 그럴싸하고 먹기도 편하다. 나는 종종 기분을 내고 싶을 때, 여기다 통통한 소시지나 고로케 -크로켓말고 고로케!-, 반숙 계란 프라이를 더한다. 여러 가지가 한 그릇에 오밀조밀 모인 모습을 보며 어떤 걸 먼저 먹을까 고민하는 것도 소소한 재미다. 다만, 반찬은 필수다. 내가 추천하는 것은 시큼 새콤한 장아찌나 김치, 물기를 쪽 짜서 오독오독 씹히는 단무지 같은 것들로, 기름진 조합에 느끼해지는 걸 막아준다.





출처: Justonecookbook.com

















때로는 한 솥 끓인 카레가 싫증 나 처치 곤란일 때도 생긴다. 여러 번 끓여 걸쭉하다 못해 빡빡해진 카레는 빵을 만들 때 쓰이기도 한다. 밀가루, 버터, 이스트, 계란을 배합해 반죽을 만들고, 그 안에 카레 소를 넣은 후 오븐에서 구워내면 고로케보다 담백하고 적당히 짭짤한 빵이 완성된다. 이게 귀찮을 적엔 그냥 모닝빵이나 두툼한 식빵 사이에 잼처럼 발라먹어도 나쁘지 않다. 물론, 가장 잘 어울리는 건 인도식 난이긴 하지만.




이렇게 갖가지 방식으로 카레를 만들다 보니 남편에게서 뜬금없는 소릴 듣기도 한다. "너 혹시 전생에 인도 사람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내 카레는 인도식이 아니다. 인도엔 '카레'도, '커리(Curry)'도 없고, 그저 향신료를 조합한 '마살라'만 있다고 한다. 중국에 짜장면이 없듯 뭐 그런 건가 보다. 이러나저러나 이국의 노란빛을 머금은 향신료는 타향살이를 하는 나 같은 이방인에게 매력적인 한끼가 되어주고 있다.


그게 어쩌면 카레의 정체성이 아닐까. 어디에서 왔는진 몰라도, 많은 이들에게 제 방식대로 친숙한.
















출처: Unsplash



카레의 색은 오묘하다. 샛노랗기도 하고, 금빛 같기도 하고, 보리밭 같기도 한, 이국의 따사로운 색. 그래서일까? 카레를 꿀떡꿀떡 삼키면, 마음을 볕에 내다 말린 기분이 든다.


















번아웃과 우울증이 심해지던 2019년 봄, 나는 도쿄에 몇 개월간 머물렀다. 내가 지냈던 동네 '무사시코야마'라는 주택가였는데, 걸어서 30분 거리에 평생 잊지 못할 카레 식당이 있다. 가게명은 <작았던 여자(Chiisakatta Onna)>.




이 식당을 발견한 건 지극히 우연이었다. 매일 씻고, 매일 걷고, 하루 한 끼는 좋은 걸 먹자는 목표를 힘겹게 지켜나가던 어느 수요일이었다. 약과 우울감에 취해 느적느적 걷던 나는 진한 카레향에 끌려 멈춰 섰다. 'Curry Cafe- Chiisakkata Onna'라고 쓰인 스케치북만 한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커피와 카레의 조화가 낯설긴 했으나, 나는 곧 그 식욕을 돋우는 짭짤한 냄새에 이끌려 가게에 들어섰다.




식당은 다 합쳐 열 개 남짓한 좌석이 있는 공간으로, 주인 혼자 운영하고 있었다. 메뉴도 고작 대여섯 개 정도 되려나? 그마저도 절반은 이런저런 사정으로 판매를 안 하곤 했으니, 그야말로 단출한 식당인 셈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맛만큼은 먹어 본 카레 중 가장 호화스럽고 복잡했다. 3분 카레라든가, 냉장고 자투리 채소를 몽땅 넣고 와그르르 끓이는 내 멋대로의 카레와는 차원이 달랐다. 나는 오목하고 넓은 그릇에 이쁘게 담겨 나온 카레라이스를 정신없이 퍼먹었다. 평소 먹던 것과는 달리 색이 진한 고동색이었고, 잘게 썬 재료에선 각각의 풍미가 가득히 흘러나왔다. 곁들여 나오는 오이 피클이나, 손가락 두 마디만 한 고추 절임, 시큼해서 눈가가 절로 찡그러지는 매실장아찌까지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 짜고, 진하고, 오래 끓여 깊어진 카레의 향이 몸을 따뜻하게 데웠다. 오래간만에 밥 같은 밥을 먹은 기분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일주일에 서너 번 그곳을 찾았다. 채소가 들어간 베지-카레, 푸릇한 야채와 카레를 비빔밥처럼 섞어 먹는 그린 샐러드 카레, 생선의 감칠맛이 밴 피시 카레 등 모든 메뉴를 다 먹었고, 매번 감탄했다. 때로는 배가 고파 접시에 코를 박듯이 먹어치우고, 어떤 날은 울기 직전의 기분으로 먹고, 또 다른 날엔 창밖의 길고양이와 눈을 마주치며 먹었다. 카레는 언제나 뜨거웠다. 그게 나에겐 참 다행인 일이었다.


이상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그때의 난 카레를 통해 위로받았다. 작았던 여자가 더 이상은 작지 않다며 오래오래 끓여 만든 카레엔, 또 다른 작은 여자를 위로할 힘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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