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사회를 위한 패션의 기능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고, 심각한 기후변화로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위협적인 이 시대. 패션이라는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분야를 공부하는 필자로서는 고민이 많다. 짙은 상업성을 기반으로 지속가능성과는 거리가 먼 패션을 들여다보는 것이 과연 시기적으로 중요한 일일까 하는 의문을 지울 수 없다. 패션이 할 수 있는 사회적 역할은 없을까? 생분해 가능한 소재를 사용하거나, 순환 시스템을 만드는 것처럼 현재의 생산방식을 개선하는 것 말고, 패션 시스템 그 자체로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해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지금까지 패션은 질문을 던져왔다. 정치적 상황을 반영하고, 기존의 사회적 기준과 관습적 정의를 비판했다. 얼마 전 별세한 세계적인 디자이너 비비안 웨스트우드를 떠올려보자.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환경과 사회적 이슈에 관심이 많았고, 기존의 소비 방식을 비판했다. 이에 ‘적게 사고, 잘 선택해서, 오래 입자’는 슬로건을 통해 양질의 제품을 만드는 생산자의 책임 또한 강조해왔으며, 다양한 기후 시위에 앞장섰다.
하지만 그가 뿌리를 두고 있는 분야는 패션산업, 전 세계에서 지속가능하지 않기로 유명한 분야다. 팽배한 과소비, 과열된 생산으로 쌓이는 재고, 매일 대량으로 버려지는 폐기물, 합성섬유로 인한 미세플라스틱, 개발도상국 공장에서 자행되는 인권침해.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왜 자신의 가치관과 전혀 다른 패션산업에 계속 몸담고 있었을까? 왜 모순을 떠안고 지속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을까?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알았던 것이다. 패션을 활용하는 것이 화두를 던지고 균열을 일으키기에 효과적이라는 것을. 이미 1970년대 펑크 흐름에 앞장서며, 저항의 메시지가 시대를 풍미하고 럭셔리 패션의 견고한 위계질서를 흐트려놓는 과정을 경험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가진 모든 매체를 활용해 기후변화 대응에 대해 외쳤다. 컬렉션 작품에는 정치적 무관심을 비판하는 문구를 담았고, 패션쇼에서는 ‘Climate Revolution(기후혁명)’을 외쳤으며, SNS에는 생태계 파괴를 경고하는 영상을 올렸다. 비비안 웨스트우드를 아는 모든 소비자가 그의 메시지를 들었고, 언론에서도 그의 메시지를 담았다.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패션 브랜드로서 가진 영향력을 정치적 행동에 활용해온 것이다. 패션은 하나의 메시지를 전 지구적으로 전달하고, 개개인의 의견을 촉발할 수 있는 영향력을 가졌다.
그렇다면, 패션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패션이 가진 힘은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새로움을 추구하는 열린 사고방식이다. 패션은 언제나 도전적인 질문을 던졌고, 그래서 인식의 변화를 이끌어온 분야다. 아름다움의 기준을 뒤집거나, 젠더 구분을 들여다보거나, 다양성에 대해 고민한 것처럼. 또 창의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담아내왔다. ‘어항 장갑’이라는 아이디어로 해양환경 문제에 관심을 유도한 보터(Botter)의 2023 봄 컬렉션이나,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경계를 표현한 로에베(Loewe)의 2023 봄 컬렉션을 생각해보자. 패션은 현재의 문제를 꼬집고, 미래의 시각을 제시한다.
둘째, 패션은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이끄는 영향력을 가졌다. 패션산업 소비자라는 네트워크는 방대하다. 더불어 패션이 사용할 수 있는 소통 창구는 비비안 웨스트우드가 활용했던 것처럼 컬렉션, 패션쇼, SNS, 잡지나 기사와 같은 언론까지 다양하다. 특히 미디어의 발달로 패션쇼와 트렌드 정보가 개개인에게 빠르게 전달되며, 패션 아이디어에 대한 다양한 관심, 반응, 대화가 촉발된다. 각자의 의견이 해시태그 등을 통해 하나의 주제로 수렴될 수도 있다.
아이디어도 있고, 사람도 있고, 심지어 자본도 있다. 패션이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해 나선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 필자는 ‘사회적 대화(Social Conversation)’에 주목했다. 지속가능한 디자인으로 유명한 에치오 만치니는 더 건강하고 평등한 디자인을 위해 ‘사회적 대화’를 강조한다. 문제 해결이라는 공통적 목표를 공유하고,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 각자의 지식과 능력을 활용해 함께 고민하는 과정에서 효과적인 대안이 나온다는 것이다. 이때 대화는 사람들이 함께 협력하고 행동하기 위한 열쇠다.
패션은 사회적 대화를 열고 이어가기에 효과적인 분야다. 새로움을 추구하는 패션의 본질적인 특성과 폭넓은 영향력이 만나면, 사회적 대화를 촉발하고 확장시키기 위한 조건이 갖춰지기 때문이다. 창의적인 사고방식, 미래를 바라보는 새로운 아이디어, 그리고 패션에 주목하는 소비자들의 네트워크. 준비물은 충분하다. 그런데 대화는 충분한가? 보터의 작품을 보고 해양 문제에 대한 논의가 충분히 이어졌는가? 로에베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뒤섞이는 세상에 대해 어떤 담론을 이끌었는가?
지금까지의 패션이 질문을 던지고 이야기의 물꼬를 텄다면, 이제는 그 다음 단계, 이야기를 어떻게 이끌어갈 수 있을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사회적 대화를 앞장서서 만들어가야 한다는 뜻이다. 일방향의 아이디어 제시가 아닌, 쌍방향의 소통을 활성화하는 것.
다소 알쏭달쏭하게 비춰지는 패션 작품을 두고 치열한 소통이 끓었으면 한다. 패션 필름 전문 기업인 쇼 스튜디오(Show Studio)에서는 다양한 패션산업 종사자들과 함께 패널 토론을 진행하는데, 이처럼 패션 브랜드를 중심으로 다수의 소비자들과 함께 대화할 수 있는 공간이 생겨나야 한다. 구찌가 주축이 되어 알레산드로 미켈레가 정의하는 젠더의 경계에 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디올이 여성성에 대한 논의를 이끌어간다면 얼마나 심도 있는 토론이 가능할까? 패션 브랜드가 던지는 대화에 직접 참여할 기회가 마련되고, 이를 통해 얕고 깊은 담론이 활발히 생겨나길 바란다.
다수의 패션 브랜드들은 젠더, 소수자, 지속가능성 등 정치적, 사회적 주제에 참여해왔다. 하지만 동시에 사회 트렌드에 따라가기 위한 수단이라는 지적이 있었다. 만약 패션 브랜드에서 표현한 정치적 주제에 대해 직접 대화를 이끌어간다면, 더 나은 세상을 위해 함께 고민하는 태도를 통해 보여주기식이라는 논란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브랜드에서 주도하는 활동에 소비자의 참여를 유도하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브랜드에 대한 이해도 또한 높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브랜드는 다양한 소비자들의 논의를 통해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새로운 대안과 사례들을 도출해갈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패션산업은 보통 기업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사람들과 논의한 대안을 실제 사업 운영과정에 반영하여 타 산업보다 훨씬 먼저 혁신적인 선례를 만들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패션이 메시지를 투영하고 논의를 촉발하는 방식은 예술의 방식과 닮아있다. 특히 예술적 표현을 담보하려는 럭셔리 패션 브랜드의 노력과, 럭셔리 패션 브랜드가 갖는 인지도와 메시지 전달력 덕분에 질문을 던지고 상식을 부수려는 패션의 시도가 더 많은 사람들한테 닿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패션이 예술과 다른 것은 ‘소비자’라는 이해관계자가 있다는 사실이다. 소비자는 감상자보다 더 적극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잠재적 참여자다. 이들은 패션에 대한 관심을 증명하고 싶어하고 구매까지 이어지는 직접적인 동인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잠재적 참여자들의 실질적 참여를 이끌어낸다면 어떤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 궁금하다.
뉴욕 타임즈의 한 기사에서는 “패션은 항상 미안한 위치였다”고 말했다. 중대한 글로벌 위기 앞에 불필요하고 중요하지 않은 제품을 생산하는 분야라서. 그런 패션이 세상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은 지금까지 패션이 잘 해왔던 것에 답이 있을지도 모른다. 질문을 던지고, 대화를 촉발하는 것.
패션은 어느 분야보다 앞장서서 현재를 빠르게 반영하는 분야다. 중요한 사회적 메시지를 알리고 대화를 시작해야 하는 분야를 말한다면 단연 패션분야여야 한다. 관습적인 사고를 탈피하고 새로운 시도가 활발히 수용되는 분야이며,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이끌어내며 다양한 반응을 일으킬 수 있는 분야. 패션 산업에서, 패션 브랜드가, 사회적 담론 형성에 앞장선다면 우리는 얼마나 다채로운 논의를 목격할 수 있을까?
[참고문헌]
에치오 만치니, 『모두가 디자인하는 시대: 사회혁신을 위한 디자인 입문서 』,안그라픽스, 2016
Grassi, A. (2020), "Art to enhance consumer engagement in the luxury fashion omain", Journal of Fashion Marketing and Management, Vol. 24 No. 3, pp. 327-341
Vogue, "Why Fashion is more political now than ever before"(2020.11.8)
Event Academy, “How the fashion world are leading the way in social engagement”(2014.9.20)
The New York Times, “Balenciaga goes where fashion hasn’t dared go before”(2022.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