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 인플루언서(Virtual influencer)를 들어봤는가? 2021년 신한라이프 광고에서 등장한 ‘로지’라는 버추얼 인플루언서를 필두로 다양한 버추얼 인플루언서들이 등장했다. 이후 그 수는 점차 늘어나, 2022년 ‘Virtual Humans’ 사이트에 등록된 가상 인플루언서의 수는 200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이들은 소셜 미디어 팔로워 수도 웬만한 연예인의 팔로워 수를 상회한다.
패션 브랜드도 이러한 가상 인플루언서의 흐름에 일찍이 합류했다. 발망(Balmain)은 2018년 세 명의 가상모델 ‘Virtual Army’를 발표했고, 미국에서는 2022년 3월 메타버스 패션위크까지 열려 다양한 가상 모델을 통해 컬렉션이 소개됐다. 지난 4월엔 국내 패션 기업 LF에서 ‘나온(Naon)’이라는 가상 모델을 선보였고, 패션잡지 더블유코리아와 화보까지 촬영했다. 실제 연예인과 달리 논란에 휩싸일 여지가 적고, 원하는 방향으로 이미지를 의도할 수 있다는 점이 주목 받았다. 이처럼 가상 인플루언서, 가상 모델은 현실의 한계를 넘어선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레슬리 제이미슨의 『비명 지르게 하라, 불타오르게 하라』에 수록된 <심 라이프>라는 에세이는 “세컨드 라이프”라는 가상공간 플랫폼에 대해 고찰한다. 세컨드 라이프는 2003년 개발된 소셜 네트워크 활동이 가능한 가상 세계다. 제이미슨은 세컨드 라이프 이용자들의 여러 사례를 통해 가상현실의 특성을 살펴본다. 예를 들어, 세컨드 라이프에서는 신체 장애를 가진 사람이 자유롭게 활동하고, 트랜스젠더는 자신이 원하는 내면의 모습을 아바타로 표현해낸다. 이런 사례는 가상현실이 현실에서는 불가한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무한한 가능성을 시사한다.
반면, 제이미슨은 이 가상현실이 “결코 당신의 상상력을 뛰어넘을 수 없다”고 지적한다. 한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은 백인으로 아바타를 설정하자 다른 이용자들로부터 더 빨리 존중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세컨드라이프의 아바타는 날씬한 백인의 몸이 다수를 차지하는데, 인종에 대한 이용자의 태도를 비롯해 사회의 미적 기준 등 중첩된 현실의 한계가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가상현실은 현실을 그대로 비추고 있었다.
가상 인플루언서의 외모를 떠올려 보자. 모두 날씬한 몸매와 길쭉한 팔다리를 가졌다. 우리가 항상 강요당하는 협소한 미적 기준이다. 또 발망의 모델 세 명은 각각 백인, 흑인, 아시안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들의 생김새는 너무도 현실적이고, 일반적이다. 백인의 피부와 옅은 눈, 흑인의 짧고 구불거리는 머리카락, 아시안의 날카로운 눈. 가상현실의 무궁무진한 가능성 속에서 백인과 흑인과 아시안이라는 아주 전형적인 인종의 구분은 꼭 필요한 것이었을까?
아바타를 매우 자유롭게 꾸밀 수 있음에도, 어떤 한계도 없는 가상현실임에도 불구하고 실제 현실의 한계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다. 가상현실은 현실을 뛰어넘을 수 없다. 가상의 가능성도 현실의 벽에 부딪히는 것이다. 오히려 가상현실이 상징하는 무한한 가능성이 현실의 문제를 더 역설적으로 나타내는 듯하다. 모든 걸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 속에서도 사회적 문제는 여전히 답습되고 있다. 과연 가상현실의 가능성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을까? 가상현실이 어느 때보다 활성화되고 있는 지금, 무한한 가상 세계에서 무한한 다양성을 실현할 수 있을까?
*표지 이미지 출처: 어센트코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