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마주한 의문이 있다. 작가도 독자가 궁금해하리란 걸 잘 알고 있어 친절히 언급해준다. “어쩌면 가족 폐지보다는 확대가족이나 개혁된 가족을 요구하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어(48).” 왜 가족의 범위를 확장하는 게 아닌, 폐지를 주장하는 걸까?
대체로 화목한 가정에서 자라난 나는 가족제도의 수혜자라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더 폐지의 필요성에 깊이 공감하지 못했다. 나는 다음 문장을 마주하고 나서야 비로소 폐지를 주장하는 이유를 가늠할 수 있었다. “가족은 이 지구에서 가장 많은 강간과 가장 많은 살인이 일어나는 장소다(22).” 이게 가족의 폐지를 주장하는 근본적인 동기였다. 누군가는 가족제도 안에서 철저히 고통 받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문장을 꼽으라면 다음과 같다. “가족의 가장 근원적인 원인은 돌봄을 사적인 영역에 가둔다는 것이다(60).” 가족 폐지를 주장하는 문제의식의 본질이다. 개인이 돌봄의 의무를 맡기 때문에 가족제도의 문제가 발생한다. 누군가는 보호자의 의무를 다하기에 굉장히 부족하고 모자란 사람일 수도 있고, 누군가는 보호자조차 없이 홀로 남겨질 수도 있다. 그 과정에서 아동과 청소년은 그들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 만한 영향을 받는다. 즉, 성공적인 돌봄이랑 복불복이었다. 어떤 부모를 만나느냐, 부모를 만날 수는 있느냐… 독서모임에서 예진님은 부모의 부양 능력이 없어 청년이 돌봄의 의무를 짊어져야 하는 상황에 대해서도 언급해주셨다. 돌봄이 사적 영역에 놓여 있다는 문제는 비단 아동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현재의 돌봄 시스템은 다양한 형태의 가족과 가족의 유무를 아우를 수 있는 방식이 절대 아닌 것이다.
작가는 종종 공동육아를 언급했다. 책의 끝에 가족을 폐지한 자리에 아무것도 두고 싶지 않다고 말했지만, 책을 읽으며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공동육아’야말로 작가가 생각하는 가족 폐지의 대안이라고 느꼈다. 공동육아는 공동체가 함께 아이를 키워내는 시스템이다. 공동체의 일원이 모두 함께 하루 24시간 어린이집을 운영하고, 함께 아이를 교육하고 돌보는 식이다. 신일숙 작가의 웹툰 <카야>가 떠올랐다. <카야>에는 여러 외계인 부족이 등장하는데, 그중 한 부족에서 공동육아 시스템으로 아이를 키우고 교육했다. 그들은 부모가 아닌 여러 사람(외계인)과의 유대감을 바탕으로 자라났다. 아름다운 이야기지만, 과연 공동육아가 현실 가능한 대안일까? 가족의 폐지는 정말 가능한 일일까?
가족 폐지에 대해 고민할수록 고통스러웠다. 나의 부정할 수 없는 기반과 앞으로 오랫동안 변하지 않을 것 같은 굳건한 사회 시스템을 없애자고 말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끊임없이 의심이 들었다. 그 시스템이 완전무결하지 않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시켜도, 혈연을 신격화하는 대한민국의 깊고 끈끈한 문화를 도무지 뒤집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 가족 폐지가 곧 여성 해방일 수 있다는 점은 가족의 형태가 현재와 같이 유지되는 한 여성은 해방될 수 없다는 뜻이고… 거대한 벽에 부딪힌 것 같은 좌절감을 느꼈다. 가족폐지는 지나치게 이상적인 논의 같았다. 현실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적었고, 공동육아라는 시스템이 이 시대에 정착할 수 있을지도 확신이 들지 않았다.
이처럼 가족 폐지는 다소 급진적이고 비현실적인 주장이나, 폐지를 주장해야만 가능한 지적이 여럿 있었기 때문에 이 책은 매우 유의미했다. 대안 가족에 대한 담론으로는 가족이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와 식민주의가 혼합된 강력한 이데올로기라는 측면을 이토록 신랄하게 들춰내진 못했을 것이다. 가족은 가부장제의 규칙을 답습하고 강화하는 장소였고, 국가와 기업과 함께 가계는 시장 경제를 구성하는 대표적인 자본주의적 주체였으며, 백인이 식민지를 세우며 원주민에게 폭력적으로 강요한 백인 중심의 제도였다. 현재의 가족 제도는 다수의 동의를 얻으며 자연스럽게 확산된 것이 아니라, 권력적인 이념을 바탕으로 확산되고 강요된 것이다. 게이와 레즈비언의 결혼에 대해 말하고, 편부모 가정과 입양가정에 대해 말한다 한들 가족제도의 폭력적인 역사와 이데올로기를 들춰낼 수 있었을까. 결국 대안 가족도 가족 제도에 편입하는 방법 중 하나일 뿐이었다.
따라서 이 책은 폐지를 지적한 그 자체만으로 중요하다. 가족제도의 근본적인 문제점은 필수적으로 논의되어야 한다. 가족 폐지에 조금이라도 가까운 방향으로 현실화시키기 위해 고민해야 한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가족이라는 형태는 꼭 폐지할 수 없을지라도, 사적 영역에 과도하게 부담된 돌봄의 짐을 덜어내야 한다는 필요성이라도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의식을 직면한 것에서부터 시작일 것이다. 작가가 가족을 폐지한 그 자리에는 아무것도 놓을 수 없다고 마무리한 것은 어쩌면 가족의 폐지 그 자체가 아닌, 폐지를 위해 나아가는 과정이 더 중요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