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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량 Oct 04. 2023

<강철부대>: 빛나는 꼴등의 서사

<강철부대>를 열심히 보는 중이다. 순간을 반복하며 영상을 길게 만든 탓에 조금씩 넘겨가며 흐름만 파악하는 셈이지만, 시간을 들여 시청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생각보다 재미있다. 어느 순간부터 마음 속으로 응원하는 부대가 생기고, 이뻐보이는 대원이 생겼다. (HID 이겨라!)


남성들의 허세가 넘치고, 근육을 과시하고, 땀 냄새 나는 이런 프로그램을 내가 시청하게 될 줄이야. 남성성이 세상의 법칙인 양 내세우는 모습은 일부러라도 외면할 줄 알았다. 그와 반대로, 강인한 여성 집단이 나오는 <사이렌: 불의 섬>은 무조건 시청하겠다 다짐했는데, 첫 화를 보고 멈춘 상태다. 이 멋진 언니들이 서로 싸우는 걸 지켜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예고편에서 비춰지는 이들의 견제와 다툼에 벌써 마음이 아팠기 때문에. 그러는 사이에 <강철부대>를 감상해버렸다. 누가 떨어지든 말든, 싸우든 말든 너무 마음이 편한 나머지 쉽게 시작하고 끝냈다. 너무 진심이면 오히려 지켜보기 어렵다. 나는 진심이 되면 너무 큰 마음을 쏟아주나 봐. 그래도 <강철부대>를 봤으니 <사이렌: 불의 섬>도 더 이상 미룰 순 없다.


<강철부대>를 감상하는 시간은 싫기도 하고 좋기도 했다. 일단 힘의 규칙으로 모든 걸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이 지겨웠다. 아니, 불편했다. 7명이서 4명을 탈락시켜야 하는 참호격투에서 가장 큰 거리감을 느꼈다. 본질은 힘을 겨루는 대결이지만, 최후 3인은 승리하는 규칙 탓에 강자의 판단으로 약자를 배제시키는 구도가 형성되었다. 강자에게는 아무도 덤벼들지 않았고, 강자의 눈빛으로 함께 제압할 상대를 결정했다. 시즌3에서는 2:2 격투로 변경되어서 서로 동등히 겨루는 상황이 유지되었으나, 시즌2에서는 강자에게 지나치게 쏠리는 권력과 불평등한 구조가 굉장히 불편했다.


그곳은 전통적 남성성에 가장 강하게 사로잡힌 공간이었다. 그들의 발성, 자세, 몸짓, 태도는 모두 최대의 남성성을 꾸며냈다. 아주 전형적인 모습으로. 특히 이들이 상의를 탈의하는 과정을 어찌나 자세히 보여주던지. 똑같이 생긴 몸을 무엇 하러 그리 열심히 스캔해주었을까. 흙탕물만 등장하면 열심히 벗어대서 30초씩 영상을 건너뛰었다. 그곳은 힘에 의해 승패를 가리기 때문에, 신체를 과시하는 것만이 자신감을 전달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좋아했던 장면들이 있다. 힘으로는 우열을 가릴 수 없었던 순간들이다. 10kg 정도 체급 차이가 나는데도 꿋꿋이 버티고 기지를 발휘해 작은 사람이 큰 사람을 이기거나, 최강대원 선발전에서 1위를 할 정도로 가장 강인했던 사람이 연이은 실수를 저지르며 패배하기도 했다. 이런 예외가 서사를 만든다. 프로그램 작가도 열광했던 부분이 아니었을까. 모두가 우수한 근력과 체력을 자랑하는 상황에서 차이를 빚어내는 건 팀워크나 투지 같은 보이지 않는 것들이었다.


무엇보다도 강철부대는 꼴등의 서사가 가장 빛난다. 실패를 감싸는 너그러움이 있고, 서로 다독이는 격려가 있다. 질책과 비난도 없고, 오로지 포옹과 토닥임뿐이다. 또 패배가 결정되었더라도 중간에 포기하는 사람이 없다. 끝까지 미션을 완료하겠다는 의지가 타오르고, 이를 악물고 해낸다. 극한의 상황에서도 중도 포기하지 않는 그들의 끈기에 얼마나 박수를 보냈는지 모른다. 눈에 띄는 것은 다른 팀들도 너나할 것 없이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는 점이다. 분명 이전에는 승패에 목숨을 걸고 무자비한 눈빛을 지닌 사람들이었는데, 상대의 승패에 함께 환호하고 함께 운다.


회차가 진행될수록 다른 팀의 패배를 확신하고 도발하는 독백이 끊임없이 반복되는데, 오로지 이기고 지는 것뿐이라는 말과는 달리 이들에게는 화합과 공감과 배려와 응원과 우애가 넘쳤다. 아, 이제 <사이렌: 불의 섬>을 볼 용기가 생긴다. 이렇게도 신체 중심적이었던 <강철부대>에도 감동한 나인데, 멋진 언니들의 멋진 서사를 보면 얼마나 열광할지!


무엇보다도 고된 훈련을 버텨낸 자만이 보여줄 수 있는 끈기와 투지가 존경스러웠다. 해병대특수수색대의 정호근 대원 “아무도 시키지 않은 걸 굳이 하는 사람들”이라서 특수부대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고생스러운 일을 자발적으로 택한 그들 덕분에 일상의 평화를 누리고 있음을 안다. 군인 친구가 미국에서 제복을 입고 길을 걸었더니 마주치는 사람마다 “Thank you for your service!”라는 인사를 건넸단다. 나도 군인들을 만나면 고생하신다며 인사를 건네고 싶은 생각이 들지만, 아마 그 뜬금없음과 쑥스러움 때문에 못하겠지. 내 은근한 눈빛에 감사가 담겼음을 부디 알아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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