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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량 Nov 07. 2023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여러 키워드가 교차된 책이다. 여성과 남성, 삶과 죽음, 개인과 국가, 사랑과 증오, 선과 악. 전쟁에는 서로 반대라고 알고 있는 모든 개념이 서로 겹쳐 있었다. 여성과 남성을 구분하되 구분하지 않았고, 죽이기 위해 애쓰는 일과 살리기 위해 애쓰는 일이 공존했다. 전쟁에 참여하는 일이 개인의 목적인지 국가의 목적인지 불분명했고, 적국의 병사를 마주하며 선악의 구분을 잃어버리는 사람도 있었다. 이 농도 짙은 삶의 공간에서 이분법은 통하지 않았다. 복잡하기만 한 세상이 압축될 뿐이었다. 책이 담고 있는 짧고 긴 이야기를 읽어내리며 수없이 울었다. 그 울음은 감동과 안타까움을 계속해서 넘나들었다. 인간은 아름다웠고, 추했다.



1


이 책은 보이지 않는 곳을 비춘다. 기록되지 않은 목소리를 담았기 때문이다. 독서모임에서 한 친구가 ‘기록하는 주체’의 권력을 언급했다. 그는 아우슈비츠를 예로 들었는데, 아우슈비츠가 독일어라는 사실을 짚어주었다. 유대인 학살을 상징하는 ‘아우슈비츠’라는 장소는 독일의 입장에서 기억하고 기록한 역사였다. 폴란드는 ‘오시비엥침'이라는 이름을 기억해달라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여성을 주체로 전쟁을 기록한 이 책은 얼마나 유의미한가. 남성 영웅에 의해, 남성 중심의 사회에 의해 묻히고 지워졌을 여성 군인이 이 책을 통해 가시화되었다.


전쟁을 몸소 치러낸 이 여성들은 이중적이었다. 이들은 전쟁이 남성의 공간이라는 공식에 휘둘리지 않으났고, 남자 군인의 무시와 비웃음에도 기죽지 않았다. 여성의 사회적 한계에 코웃음치고 거뜬히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전통적인 여성성을 그리워했다. 자수를 놓고 싶어했고, 전쟁 중에서도 풀꽃의 아름다움을 목격할 줄 알았다며 이를 자신의 여성성과 연결시킨다. 무기를 인형처럼 들며, 살상의 자세와 양육의 자세를 섞어버렸다. 전통적 여성성을 열심히 배반하고 살았던 이들은 오히려 누리지 못한 여성성을 그리워하고 상상하며 전쟁의 시간을 버텼다. 이들의 복잡한 여성성을 보수적이라 해야 할지, 진보적이라 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여성성의 거부와 수용의 경계에 위치한 독특한 사람들. 남성의 방식을 수용하는 걸 거부한 여군이 오히려 고정관념을 깨는 듯했다. 성별과 젠더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들의 모순이 오히려 경계를 허문 것일지도 모른다.


이들에겐 전투가 끝난 다음의 시간이 특히 처절했다. 종전 이후, 남성 군인이 승리의 고함을 지르는 동안 이들은 숨어야 했기 때문이다. 여성들은 공을 인정 받지도, 당당히 내세우지도 못했다. 남성과 함께 지냈다는 이유만으로 손가락질 받거나, 동료처럼 지낸 남성에게도 ‘여성적' 매력이 없다며 소외되었다. 이 책은 여성이 전쟁으로 인한 폭력을 이중으로 겪는다는 사실을 고발한다. 이들은 전쟁 그 자체의 물리적 폭력뿐만 아니라, 여성의 위치에 따른 사회적 폭력까지 겪어야 했다. 사회가 규정한 여성의 위치는 전쟁 안팎으로 이들을 괴롭혔다. 이 책이 아니었다면 전쟁이 끝나고 지워진 이들의 애환이 기록될 수 있었을까?



2


민주주의 사회에서 나고 자란 나는 공산주의에 대한 체화된 거부감이 있었다. 맹목적인 집단성은 경계하고자 했고, 개인을 묵살하는 집단은 비난해왔다. 그러나 이 책에서 전쟁에 자발적으로 뛰어든 사람은 혼자 평안을 누릴 수 없다며 나섰고, 고향 땅을 지키기 위해 마음을 다잡았다. 이런 서술이 나온다.


“그들은 선량하고 정직한 사람들이었어. 스탈린이나 레닌을 믿은 게 아니라 공산주의 사상을 믿었지. (…)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믿은 거야. 모든 사람들을 위한 행복.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한 행복. 바로 그걸 믿었어.”


공산주의 국가의 사람이라 나라를 위해 몸 바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또 다른 면모를 보았다. 사상은 해석의 문제임을 느꼈다. 물론 교육을 빙자한 국가의 세뇌도 배제할 수는 없겠지만, 사회주의에 대한 개인의 해석이 이토록 숭고하다는 것이 내겐 새로웠다. 사상은 길일 뿐이고 목적지가 아니었다. 우린 결국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한 행복"이라는 공통된 목적을 공유한 것이 아닌가.


이 책은 소련 병사의 이야기를 담고 있으면서도 독일군을 적대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으로 대면한 독일군을 묘사했다. 필사적으로 적군을 살리는 의사들이 있었고, 독일군 포로에게 빵도 주고 죽도 주고 퍼주던 병사들이 있었다. 인간은 어디까지 악해질 수 있고 어디까지 선해질 수 있는가? 이들에게 살생은 악의가 아닌 의무였을 뿐이다. 전쟁에는 인간성을 저버린 폭력이 가득하면서도, 폭력을 초월한 선이 있었다.


한 군인은 부상을 입은 독일군 장교를 함께 챙겼던 이야기를 하면서 이해가 되냐고 물었다. 사람을 가른 임의의 이 얼마나 단단하면서도 무른지 묻는 질문이다. 편을 가르는 건 얼마나 무용한 일인지, 개개인으로서 마주치는 순간 그저 같은 사람뿐이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이다. 우리는 사상을 명명하고, 집단화되는 것을 피해야 할까? 복잡한 일이다. 다만 생명이 가장 최우선의, 불변의, 불가침의 가치이길 바랄 뿐이다.



3


이 책이 중요한 것은 전쟁을 아주 가까이에서 기록했다는 점이다. <인생의 역사>라는 책에서는 죽음을 세는 법을 말하기 위해 기타노 다케시라는 일본 감독의 말을 인용한다. “5천 명이 죽었다는 것을 5천 명이 죽은 하나의 사건이라고 한데 묶어 말하는 것은 모독이다. 그게 아니라 한 사람이 죽은 사건이 5천 건 일어난 것이 맞다." 중요한 관점이다. 무수한 개인의 비극을 어떻게 하나로 묶을 수 있을까. 같은 장소와 시간이라도 죽음은 모두 달랐고, 일일이 괴롭고 슬펐다. 이 책은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묶어버린 수많은 비극을 풀어헤쳐 보여주었다. 그제서야 전쟁이 제대로 보였다. 개인이 어떤 비극을 마주하는지, 서로 다르고 같은 비극이 어떻게 끝없이 이어지는지 보였다.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야 그 참혹함이 제대로 드러났다. 그 모든 이야기를 담은 이 책은 전쟁을 얼마나 구체적으로, 낱낱이 폭로하는가.


책의 말미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전쟁영화를 봐도 사실이 이나고 책을 읽어도 사실이 아닌 거야. 그러니까, 그게 달라… 뭔가가 달라. 그렇다고 전쟁을 직접 겪은 내가 이야기하면 정확하냐. 그것도 아니거든.” 이처럼 전쟁은 재현이 불가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더더욱 축약되어선 안 된다. 작가는"거대한 역사를 인간이 가닿을 수 있는 작은 역사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그래야 뭐라도 이해할 수 있을 테니까"라고 말한다. 언어는 고통을 담을 수 없고, 그런 언어로 기록된 역사는 모든 감정 일축한다.


이 책에 담긴 이야기를 연이어 읽다보면, 전쟁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고통을 삭제하고 생략하고 묵인하고 지우고 가뒀는지 생각하게 된다. 지금껏 전쟁은 역사 교과서에 등장하는 큰 사건으로만 기억할 뿐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쉽게도 입에 올렸던 것이다. 시체가 쌓였다는 물리적인 묘사를 읽어야만 전쟁을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었다. 바다보다 바닷물 한 방울의 세계가 더 소중하다는 작가의 관점만이 전쟁의 심각성을 고스란히 담는다. 학창시절을 거치며 매년 역사 교육을 받을 때 이 책을 함께 읽었으면 어땠을까. 6.25 전쟁에 대해서 배울 때, 참전 용사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모두가 그렇게 전쟁의 고통을 간접적으로나마 느껴보며 눈물지어 보았다면, 전쟁은 없어질 수 있을까? 쟁을 겪은 자만이 장난감 총을 끔찍해 했다.


전쟁은 크게 보아선 안 된다. 최대한 미시적으로 보아야 한다. 엄마를 잃고, 아빠를 잃고, 남편을 잃고, 형제자매를 잃고, 자식을 잃은 이야기, 그 하나하나의 이야기를 반복해서 되새겨야 한다. 그래야 전쟁의 끔찍함을 조금이라도 체감할 수 있다. 구체적인 고통을 읽어내는 순간, 오로지 평화만을 굳건히 바라고 싶어진다.





이 죽음의 이야기는 하나같이 이상했다. 생소하고 낯설었다. 실화임을 알지만, 와닿지 않았다. 정말 이런 죽음들이 있었다고? 국가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위해 실질적인 삶이 끝나버린 젊고 어린 사람들이 있었다고? 더 믿을 수 없는 건 이 이야기가 들려온 곳에서 지금도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심지어 이 책을 읽는 사이에는 하마스와 이스라엘 간에 전쟁이 발발했다. 전 세계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로 편을 가루며 다투어대고 있지만, 우리가 외쳐야 할 것은 따로 있다. 반전(反戰). 피와 눈물이 짧게 편집된 뉴스로는 고통을 헤아릴 수 없다. 당사자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야 한다. 가장 미시적인 이야기로.


책의 가장 마지막, 이런 독백이 적혀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서로 미워해. 다시 서로를 죽이고. 나는 그게 제일 이해가 안 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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