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희량 Dec 15. 2023

애정

시선은 마음을 송출하는데, 글은 꾸준한 시선을 잡아채야 하니 얼마나 복스러운 일인가. 종종 글을 읽어준다는 일이 얼마나 거대한 애정인지 생각한다. 문장을 따라가기 위해 움직이는 눈과 뇌와 온몸의 근육들은 그 순간 내 글, 나만을 향해 있으니.


인스타그램에도 글 쓰는 계정을 만들어서 평습을 올리는데, 팔로우해주는 사람들은 모두 날 알고 아끼는 사람들이다. 가끔씩 글 잘 보고 있다며 감상 또는 격려 또는 응원의 말을 전해주는데 얼마나 고맙던지! 내 글이 지나치게 진지할 수도 있다는 점은 잘 인지하고 있다. 먹고 살기 바쁜 세상에 젠더는 얼마나 복잡한 개념이며, 죽음을 논하는 일은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는 여유와 같을지도 모르고, 그외 여러 글들에서도 내 글엔 비효율적인 심각함이 묻어날 것이다. 난 좀 무거운 사람일지도. 실제로 만나면 그렇게 웃음이 헤플 수가 없는데.


내 글의 낮은 효용에도 불구하고 한 문장씩 읽어주는 그 눈빛과 마음은 얼마나 상냥한가. 내 글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날 쳐다봐주는 시간을 만들어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 생각을 드러내고, 누군가 들여다보아주는 값진 시간.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날 좋아해준다는 간단한 셈법은 몹시 어려울 수 있지 않은가. 내가 좋아하는 것을 당신이 좋아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등가교환이나 등호는 사람 사이에서 성립되지 않는다. 당신은 나와 어긋나는 차이를 끌어안으며 글을 읽는 것이다. 이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가늠해보아야 한다. 당신의 애정은 참 기적적이다.


가끔 회의에 빠질 때가 있다. 회의는 뚜렷한 목적이나 가치를 잃어버렸을 때 찾아온다. 그러니까 그때 나는 글을 쓰는 목적과 내 글의 가치를 잠시 분실한 상태다. 무엇을 위해 쓰며, 무슨 의미가 있는지 찾지 못한다. 세상을 움직이는 힘찬 동력을 생각하며 그에 비해 내 글이 보잘것없음을 생각한다. 특히 자본의 법칙으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어쩌면 무의미한 일일지도 모른다며.


최근에 예진님이 <아무도 읽지 않는 글을 쓰는 창작자에게>라는 글을 썼다. 그 글은 내가 계속 써도 된다는 안심을 주었고, 지금도 괜찮다는 위로를 건넸고, 그럼에도 지속해야 한다며 등을 떠밀었다. 만들어놓은 글의 영속성을 짚어주며, 우리보다 더 오래 살아남을 거라고 속삭였다. 그런데 심지어! 내 글은 읽어주는 사람이 있다. 내 작업은 부정할 수 없이 유의미했다. 당신의 시선이 내 글의 가치와 의미를 구성해주었다.


오랫동안 내 글을 바라보아 주는 당신의 상냥한 시선을 위하여 이 글을 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