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은 마음을 송출하는데, 글은 꾸준한 시선을 잡아채야 하니 얼마나 복스러운 일인가. 종종 글을 읽어준다는 일이 얼마나 거대한 애정인지 생각한다. 문장을 따라가기 위해 움직이는 눈과 뇌와 온몸의 근육들은 그 순간 내 글, 나만을 향해 있으니.
인스타그램에도 글 쓰는 계정을 만들어서 평습을 올리는데, 팔로우해주는 사람들은 모두 날 알고 아끼는 사람들이다. 가끔씩 글 잘 보고 있다며 감상 또는 격려 또는 응원의 말을 전해주는데 얼마나 고맙던지! 내 글이 지나치게 진지할 수도 있다는 점은 잘 인지하고 있다. 먹고 살기 바쁜 세상에 젠더는 얼마나 복잡한 개념이며, 죽음을 논하는 일은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는 여유와 같을지도 모르고, 그외 여러 글들에서도 내 글엔 비효율적인 심각함이 묻어날 것이다. 난 좀 무거운 사람일지도. 실제로 만나면 그렇게 웃음이 헤플 수가 없는데.
내 글의 낮은 효용에도 불구하고 한 문장씩 읽어주는 그 눈빛과 마음은 얼마나 상냥한가. 내 글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날 쳐다봐주는 시간을 만들어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 생각을 드러내고, 누군가 들여다보아주는 값진 시간.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날 좋아해준다는 간단한 셈법은 몹시 어려울 수 있지 않은가. 내가 좋아하는 것을 당신이 좋아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등가교환이나 등호는 사람 사이에서 성립되지 않는다. 당신은 나와 어긋나는 차이를 끌어안으며 글을 읽는 것이다. 이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가늠해보아야 한다. 당신의 애정은 참 기적적이다.
가끔 회의에 빠질 때가 있다. 회의는 뚜렷한 목적이나 가치를 잃어버렸을 때 찾아온다. 그러니까 그때 나는 글을 쓰는 목적과 내 글의 가치를 잠시 분실한 상태다. 무엇을 위해 쓰며, 무슨 의미가 있는지 찾지 못한다. 세상을 움직이는 힘찬 동력을 생각하며 그에 비해 내 글이 보잘것없음을 생각한다. 특히 자본의 법칙으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어쩌면 무의미한 일일지도 모른다며.
최근에 예진님이 <아무도 읽지 않는 글을 쓰는 창작자에게>라는 글을 썼다. 그 글은 내가 계속 써도 된다는 안심을 주었고, 지금도 괜찮다는 위로를 건넸고, 그럼에도 지속해야 한다며 등을 떠밀었다. 만들어놓은 글의 영속성을 짚어주며, 우리보다 더 오래 살아남을 거라고 속삭였다. 그런데 심지어! 내 글은 읽어주는 사람이 있다. 내 작업은 부정할 수 없이 유의미했다. 당신의 시선이 내 글의 가치와 의미를 구성해주었다.
오랫동안 내 글을 바라보아 주는 당신의 상냥한 시선을 위하여 이 글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