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있는 게 휴식은 아니야
“술술 읽히고 재밌더라. 너도 한 번 읽어봐-“ 엄마가 아침에 책 한 권을 스윽 내밀었다.
'걷는 사람', 하정우
하정우가 걷기를 좋아하는지도 몰랐고 책을 낸 것도 몰랐지만 엄마가 좋아할 만한 책인 것만큼은 틀림없었다. 몇십 년간 꾸준히 걷고, 최근에는 하루에 만 보 걷기를 실천하고 있는 엄마기에. 엄마를 따라가려면 멀었지만 여행 가서 8시간씩 걸어 다닐 정도로 나름 걷기를 좋아하는 사람이기에, 하정우는 멋진 배우이기에 냉큼 책을 집어 들었다.
쉽지 않은 한 주였다(라고 쓰고 X힘들었다라고 읽는다). ‘왜 이렇게 나한테 시련을 주는 거야’라는 말을 달고 살았다. 동료에게 ‘오늘의 찡찡’이라는 테마 아래 매일매일 메신저로 힘듦을 토로했다. 저녁 먹고 카페에 가서 일하는데, 월요일에 만든 투썸 하트 앱에 하트가 4개 쌓였다. 궁상맞게 카페에서 눈물이 나왔다. 부정적인 찰나의 기분에 휘말려 감정의 나락 속으로 계속하여 빠져들었다.
집 앞 5분 거리, 10분 거리에 투썸이 있다. 일할 때는 무조건 10분 거리의 투썸으로 간다. 신축이어서 조금 더 쾌적한 것도 있지만, 10분 거리 투썸에 갈 때는 따릉이를 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릉이 타는 시간보다 신호등 기다리는 시간이 더 긴 것 같지만 그 잠시나마의 기분이 좋다. 다리를 건너며 노을 지는 하늘을 보며 사진을 찍을 수도 있다.
카페가 문 닫는 시간은 10시. 카페 바로 옆에 재수학원이 있어 학생들이 우르르 나온다. 단점은 따릉이 경쟁이 치열하다는 것. 10시에 따릉이 앱을 켜면 항상 지도에 0밖에 없기에 도대체 누가 타는 건가 했는데, 범인은 학생들이었나 보다. 한 번은 일부러 9시 반에 나오니 그나마 2대가 남아있길래 탈 수 있었다. 며칠 전에는 10시에 나왔는데 1대가 남아있길래 신나서 집 반대쪽의 정류장까지 뛰어갔는데, 눈앞에서 다른 학생에게 놓치고 말았다. 10초만, 아니 5초만 더 일찍 나올걸, 그때의 아쉬움을 잊을 수 없다.
집 앞 정류장까지 걸어가면 그때부터는 따릉이가 몇십 대씩 몰려있다. 역시나 학생들이 학원 끝나고 아파트 단지까지 타고 오는 게 틀림없다. 노트북 든 가방을 따릉이 앞 바구니에 넣고 그제라도 타기 시작한다. 이 시간에 집에 가서 일하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한데, 유튜브나 넷플릭스를 조금이라도 더 볼 수 있는 기회인데, 이미 피곤한데, 그래도 앱을 켜서 ‘대여하기’를 누른다.
밤이니 후레시가 켜지는지 확인하고(가끔 후레시가 안 켜지는 불량 따릉이들이 있다) 중랑천을 따라 페달을 밟기 시작하면 숨통이 트인다. 바람을 맞으며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니 걱정과 고민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다. 일부러 노래를 듣지 않고 내 눈앞의 풍경에 집중한다. 가족들끼리 오순도순 걷기도 하고, 친구들끼리 신나게 대화하며 자전거로 내 앞을 가로질러간다. 꼬마애들은 내가 잽싸게 피해 가고, ‘지나갈게요’ 하며 전문 자전거인(?)들도 있다. 그때는 신속하게 길 가장자리로 붙어야 한다. 앞에서 다가오는 자전거 중 따릉이를 탄 사람이 지나가면 괜스레 우리는 친구라는 생각이 든다.
따릉이를 타고 오면 시원하면서도 너무 덥다. 집에 와서 샤워하고 난 후에는 수박을 집중해서 먹고, 얼음물로 입가심한다. 종일 머리만 쓰다 몸도 움직여주니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그새 오늘의 힘들었던 무언가는 내 마음속에서 바람 빠진 풍선처럼 조그맣게 줄어들었다.
“걷기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것만 같았던
과거의 어느 막막한 날에도, 이따금 잠까지 줄여가며 바쁜 일정을 소화해야 하는 지금도
꾸준히 나를 유지하는 방법이다.
이 점이 마음에 든다.
내가 처한 상황이 어떻든, 내 손에 쥔 것이 무엇이든
걷기는 내가 살아 있는 한 계속할 수 있다는 것.”
- 걷는 사람, 하정우
하정우에게 걷기가 있었던 것처럼 지금 내 일상을 잡아주는 건 따릉이다. 기분이 좋을 때나 나쁠 때나 힘차게 밟는 페달과 시원한 바람의 조합이라면 금세 단순하고 긍정적인 나로 돌아올 수 있다. 예전에 쉼이 필요할 때 침대에만 누워있었던 적이 있다. 종일 침대에만 누워있으면 몸과 마음이 회복되는 줄 알았다. 이제야 나 자신을 조금이나마 더 이해하게 된 건, 나에게는 그냥 누워있는 것보다는 조금 더 알찬 휴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든든한 버팀목을 얻었으니 더 자신 있게 계속 나아가도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