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가 되어서야 비로소 알게 된 것

by 이레네

백수가 된 지 16일 차. 사회적 기능 없이 온전히 나만의 시간들로 하루하루를 채워나가고 있다. 내 의지로, 나만의 생각들로 정리해 가는 하루는 자유와 충만함을 주는 동시에 종종 지루함을 갖고 오기도 한다. 한 해가 갈수록 삶의 시간에 가속도가 더해져가고 있었던 지난 날들. 갑작스러운 브레이크를 걸면 고장이 나버릴 것만 같았지만, 생각보다 내 삶은 원래의 제 속도를 찾아 차분하게 흘러가고 있다. 매일 글을 쓰고,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뉴스를 본다. 직장과 나, 세상에 딱 이 둘 뿐인 것만 같았던 내 생활에 다시 여러 가지의 자극거리들이 나를 조금씩 건드린다. 그리고 나도 그들에 반응하기 시작한다.




1. 시간은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일주일, 한 달, 분기, 일 년. 직장을 다녔을 때는 시간이 정말 빠르게 흘렀다. 매일 주말을 기다리다 보니 일주일이 빠르게 지나갔다. 중요한 업무 일정들, 해야 할 일들의 기한을 맞추다 보면 분명 월초였던 시간은 어느새 월말이 되어 있었다.

백수가 되어보니 시간의 흐름이 정상궤도에 안착했다. 원래의 제 속도대로 흐르기 시작했다. 새벽아침에 눈을 떠 천천히 아침을 차리고 나만의 아침 일상을 보낸다. 그렇게 매시간을 나만의 일정으로 채워나가다 보면 하루가 꽤 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늘이 며칠인지 문득 달력을 보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2-3일 정도가 덜 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오늘이 18일인 줄 알았는데 어제가 15일이었구나. 시간은 원래 이런 속도였구나.


2. 잊고 있던 매일 하루의 흐름

새벽에 어스름히 뜨는 아침해부터 오후의 노을까지. 해가 떴다가 지는 그 모든 순간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았다. 해를 보지도 못한 채 종일 모니터만 보면, 오늘의 날씨가 비가 오는지 쾌청한 지조차 모르고 하루를 보낸다. 계절의 변화도 늦게서야 알아차렸던 것 같다. 나만의 일상을 보내다 보니 하루의 시작과 끝을 생생하게 관찰할 수 있다. 틈틈이 거실 창문을 통해 바깥 풍경을 보는 것은 요즘 새로 생긴 새로운 습관이다.


3. 우리의 몸은 움직이기 위해 존재한다.

하루 종일 모니터 앞에서 열심히 손가락만 움직이다 보니 몸이 고장 날 수밖에. 고관절은 굳고 장요근은 짧아지고 상체는 굳어갔다. 요가 수련을 하면서 굳은 상체를 제대로 펴지 못해 애꿎은 허리를 더 쓰려고 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숨을 제대로 못 쉬는 것은 덤이다. 집중해서 일하다 보면 내가 숨을 쉬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아무리 숨을 깊이 쉬려 해 보아도 잘 내쉬어지지 않는다. 8시간 동안 긴장하고 위축된 탓이다.

지금은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내며 지속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크고 작게 부엌 정리를 하고, 청소기를 돌리고, 요가/SNPE/헬스 운동을 하고, 스트레칭으로 하루를 마무리한다. 우리 몸은 움직이기 위해 존재한다. 들이마시고 내쉬는 숨을 느끼고 내 몸의 감각을 깨워나간다.


4. 세상 일에 관심을 쓸 여력이 생긴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직장 생활을 한참 할 때에는 뉴스를 잘 보지 않았다. 정치사회 이슈에 대해서도 점점 더 무뎌져갔다. 매일 정신없는 일상을 보내다 보니 사회에 관심을 갖고 스스로 생각할 기운이 없었다. 고단한 조직생활은 우리의 생각하는 힘까지도 마비시킨다.

신기한 점은, 일상에 여유가 생기면서 자연스레 뉴스를 다시 찾게 되었다는 점이다. 요즘 매일 아침 일상 중 하나는 뉴스보기이다. 다양하게 매일 소식을 접하고 스스로 생각이라는 것을 하기 시작한다. 좋은 기사를 보면 질투심 약간에 열망하는 마음을 담아 스크랩을 하기도 한다. 어느 순간부터 사회생활에 찌들어 점차 나만의 목소리를 잃어갔던 것이 아닐까.




미친 듯이 돌아가고 있던 톱니바퀴가 비로소 원래의 속도를 찾았다. 쉴 줄 모른 채 돌던 톱니바퀴는 내 몸과 마음 곳곳에 상처를 주고 있었다. 이제는 잠시 멈추고 재점검을 할 때. 기름칠을 하고 나사를 다시 조이며 앞으로 다시 나아갈 길을 기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