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릇된 사고방식과 매 순간 투쟁하기
이 주제로 오래전부터 글을 써오고 싶었다. 혼인관계를 맺은 이후로 맞닥뜨리게 될 교회 안에서의 이야기를.
다행히 결혼식 다음날에 딱 한 번을 제외하고는, 나는 아직까지 배우자의 교회에 물리적인 출석을 하고 있지 않다. 코로나가 준 수혜를 누리고 있다.
덕분에 공식적인 결혼식 후 6개월이 다 되어가도록 이 주제에 대해 글을 쓸 필요가 없었다.
배우자는 젊은 목회자다.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난 나조차도 목회자와 결혼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잘 몰랐었다.
사실 지금까지도 특별한 의미가 있는 건 아니다.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들이 있을 뿐.
가난할 것이고, 배우자의 사역을 위해 헌신해야 하며, 때로는 교회에서 필요한 역할도 감내해야 하는.
목회자와 결혼한 배우자에게 교회가 흔히 기대하는 ‘환상’이다. 나는 이 ‘환상’에 균열을 내어주는 게 내 삶 가운데 사소한 목표가 되었다(그렇다고 인생을 통으로 걸친 거창한 목표는 아니다. 그 정도로 내게 중요한 의미는 아니니까).
배우자의 지인을 만나러 함께 시간을 낸 적이 있었다. 그 지인도 뼛속까지 ‘교회 사람’이었다. 금요일 오후, 지인이 운영하는 카페를 들러 배우자가 나를 소개했다.
내가 일찍 퇴근을 하여 함께 올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러자 돌아온 한 마디는 내게 1차 빡침을 선사했다.
“어머, 아직도 일을 해?”
문장 안에 단어 하나하나가 아직도 선명하다.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과거 목회자와 결혼하는 배우자는 대부분이 직업이 없었고 사역을 함께 했었다. 그게 당연했다. 그 지인은 아직도 그 시대에서 살고 있었다.
나는 첫 만남 때부터 그 사람이 마음에 들 수가 없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눈을 잘 마주치지 않는 탓에, 나는 스스로 소외됨을 자처했다. 배우자와 해당 지인이 대화를 하고 나는 옆에서 핸드폰을 하거나 차만 벌컥벌컥 들이킬 뿐이었다.
그러곤 2차 빡침이 왔다.
“이제 애 가져야겠네, 애는 언제 가질 거야? 빨리 가져야지.”
우리 부모님도 하지 않는 질문을 왜 생판 모르던 사람에게서 들어야 할까?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툭툭 던지는 대표적인 질문이다. 다른 사람 같으면 그러려니 지나가겠지만 이미 첫인상이 어그러졌던지라, 그 질문조차 불편함과 무례함으로 다가왔다.
마지막 3차 빡침이 남았다. 지인은 주변에 돈 많은 노총각이 있다며, 내게 주위 언니들 중에 괜찮은 사람이 없는지 물었다.
“여기는 집안에 돈이 많아서 그냥 살림 잘하고 애만 잘 낳아주면 돼. 애 하나 낳으면 5억씩 주겠대”
1, 2차 빡침에 대해서는 직접 대꾸하지 않았다. 대꾸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어처구니없는 마지막 말에는 직접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요즘 세상에 그런 여자는 없어요.”
무례함과 구시대적인 사상으로 점철한 사람과 대면하는 건 생각보다 훨씬 기분이 나쁘고 무기력해지는 듯하다. 교회라는 곳은 저런 사람이 득실거리는 곳이겠지. 그날 나는 생각지 못한 투쟁의 중심에 서 있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면, 요 근래 일이 힘들어 잠시 일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해당 지인과의 만남으로 3차 빡침까지 온 나는 죽기 직전까지도 일을 하다 죽어야겠다는 다짐을 굳히게 되었다. 가끔 일을 하기 싫을 때에는 교회 사람들을 한 명씩 만나 꽉 막힌 사고를 직접 대면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
목회자인 배우자와 결혼했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어떤 특정한 존재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내 배우자는 NGO에 근무하는 나와 결혼했다고 외부에게서 부여받는 역할이나 기대사항이 없다. 역지사지로 생각하는 능력을 키웠으면 좋겠다. 나는 그냥 나로서 존재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