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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레네 Jul 29. 2021

네 잘못이 아니야.

두 번째 화살은 피하기 위해, 누군가의 첫 번째 화살을 막아주기 위해

정여울 작가는 ‘첫 번째 화살은 피할 수 없지만, 두 번째 화살은 피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어릴 적 당하던 학대나 왕따, 신입생이었을 때 겪은 관계의 어려움 등, 아직 서툰 순간에 날아오는 공격을 우리는 정통으로 맞을 수밖에 없다. 누군가는 그때의 아픔을 그저 묻어두고 잊으려 하지만, 아픔을 제대로 주시해야만 비슷한 일을 또 맞닥뜨리지 않을 수 있다.


이 말은 내게도 여러 순간을 떠오르게 했다. 그중 가장 최근이자 아직도 종종 내 마음을 쿡쿡 쑤시는 시간을 다시 꺼내보고자 한다. 이 주제로 글을 쓰려고 생각했을 때 머리가 복잡했다. 아직도 어디서부터 어떻게 꺼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차근히 적어내려가 본다.






원했던 곳에 입사했다는 기쁨에 그저 해맑기만 했던 신입사원 시절. 불과 2년 전의 일이다.

1년 동안 나를 가장 괴롭혔던 것은 ‘나 때문에’라는 생각이었다. 나 때문에 프로젝트를 망쳤고, 나 때문에 일이 엉망이 되었고, 나 때문에 같이 일할 수 없다는 그 수많은 말들. 모든 것이 처음이었던 나에게는 그 말들에 저항할 만한 근거도, 나 스스로를 방어할 힘도 없었다. 그들이 나 때문이라고 하면 나도 나 스스로에게 화살촉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나를 위해주었던 사람은 없었다. 팀장님마저 내 탓이라며 혼낼 때는 그 순간 체중이 3kg는 빠져나가는 듯했다. 오죽하면 지나가던 동기가 나를 보고서 “왜 이렇게 살이 빠졌어?”라고 말했을까. 분명 그 동기와 그날 점심을 같이 먹었는데 말이다.


주도적으로 나를 괴롭게 했던 그 사람은 팀의 전체 분위기까지 주도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나를 지목하는 순간 그곳에는 나를 감싸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중 한 명이라도 조용히 내게 다가와 “그 사람 때문에 힘들지?”라고 말해주었더라면. 아무도 내게 그 사람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 않으니, 내가 먼저 ‘그 사람 때문에 힘들어요’라고 말할 수 없었다. ‘네가 잘못했으니까’라는 답을 들을 게 뻔했던 분위기였으니까.


행여라도 팀원 중 한 명과 단 둘이 대화를 나눌 때가 있어도, 나는 나의 역량이 부족할 뿐이라며 애써 웃으며 말할 수밖에 없었다. 둘 중 누구도 그 사람에 대해 먼저 언급하는 사람은 없었다. 마치 그 사람은 당연하게 나를 혼내고 소리 지를 권리가 있다는 듯했다.


다른 팀원이 내게 힘든 점은 없는지를 물어봐주길래 조심스레 그 사람을 언급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답은 ‘내가 잘해야 한다’는 것뿐. 그 이후로 1년 내내 나는 입을 굳게 닫았다.


그때 내게 힘든 점이 없는지 물어봤던 그 사람은 본인이 한 일에 대해 자부심을 느낄 것이다. 팀에서 어려워하는 신입사원을 데리고 조언을 해주었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그가 내게 한 말은 나를 살리는 게 아니라 죽이는 말들이었다. 결국 화살을 내 심장 쪽으로 더 가까이 두게 하는 겪이었다.


팀의 분위기는 신입사원이 싼 똥을 치우느라 고생이다, 로 몰아가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숨이 조여져 왔고 표정은 어두워져만 갔다. 매일 아침 출근길, 지하철에서 간절히 기도했다. 제발 오늘 하루가 무사히 지나가게 해 달라고.






그런 내게 회복의 길이 열린 건 지금 있는 곳으로 발령을 와서부터였다. 1년 내내 칭찬이나 격려 하나 받아본 적 없는 내게, 지금 이곳은 무한한 응원과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작은 일에도 ‘죄송하다’는 말을 뱉기 바빴던 나. 이곳으로 발령 온 지 얼마 안 되어 ‘죄송하다’는 말을 했더니, 뭐 이런 걸로 죄송까지 하냐며 그럴 필요 없다는 말을 해주더라.


신입 때 팀장님은 연말에 나를 불러 발령을 가라고 했다. 이곳에 더 있어봤자 내게 좋을 게 없다는 말이었다. 그때는 그냥 퇴사하라는 뜻인 줄 알았다. 그 해의 12월은 내내 우울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 발령 온 곳에서 이만큼 회복한 나를 보면 그때의 팀장님께 감사하기는 하다. 원망 어린 마음도 있다. 왜 그때 나를 더 보듬어주지 않았는지, 나를 괴롭히던 그 사람을 제지하지 않았는지.


지금 근무지로 오면서 내가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문제는 내게 있는 게 아니라 그들에게 있다는 걸 알았다. 팀의 문제를 구조적으로 고민하는 게 아니라, 너무 쉬이 가장 연약한 자에게 책임을 전가해버리는 그런 자들이 문제라는 것을.


덕분에 나의 회복탄력성은 더 강해졌지만 그때의 기억은 여전히 내게 다가와 종종 마음을 어지럽힌다. 지금 근무지에서의 신입사원들을 보면 부럽다. 누구에게나 처음의 기억은 소중한데, 나의 첫 기억은 그렇게 얼룩졌으니.


스스로 경계하는 점이 크게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지나간 일로 가끔 울적해질 수는 있으나 너무 피해자 감정에 매몰되지는 말자. 그리고 나는 그런 사람과는 반대의 길을 가자.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복수는 그 사람의 방식이 틀렸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시간이 흘러 내게 권력이 생겼을 때, 그 권력을 어떻게 사용할지를 생각한다. 약자의 위치에 직접 있어보는 것만큼 소중한 인생 경험이 또 있을까. 그때의 경험을 통해 어떤 말이 격려를 줄 수 있는지, 어떤 말이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독이 되는지를 배웠다.


나를 향해 또 날아올지 모르는 두 번째 화살은 피하면서, 내 주변에서 첫 번째 화살을 맞고 괴로워하는 누군가를 지켜주고 싶다.


그렇게 오늘도 여유와 친절이 배어있는 리더가 되기를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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