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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밋너 Apr 21. 2018

이미 끝나버린 당신들의 분노가 미워서

현재진행형인 나의 분노를 위해, <쓰리빌보드>



분노는 현재진행형 명사다. 물론 그 단어 자체는 -했다와 붙어 분노했다, 라는 과거동사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분노했다는 것은 곧 지금은 분노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분노가 종결됐음을 의미하는 종결동사다. 그러니까 분노라는 단어 자체는,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 그러니까 현재에 존재하는-과거부터 지금까지 존재해 온 그런 것들에 대한 현재진행형 명사다.


밀드레드의 마음 안에 도사린 분노는 7개월을 묵은, 그러나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명사다. 영화에 등장하기엔 조금 짧아보이고, 어떤 의미로는 너무 즉각적이지 않다. 하지만 밀드레드에게 그 7개월은 곧 지옥에서 보낸 시절들이고 여전히 펄펄 끓는 열탕이며 심지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미래지향형 명사다.



<쓰리빌보드>의 분기점은 여기다. 밀드레드의 분노는 현재에 존재하고 있다. 시간과 공간을 바둑판 위에 구성했을 때 밀드레드의 말은 그 모든 공간에 빼곡하게 존재한다. 피해자가 그의 딸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그가 죽어버린 피해자가 ‘야기’한 분노의 천원(天元)이기 때문에. 그래서 밀드레드의 분노가 존재하는 그 시공간은 에빙의 모두와는 다른 차원이다. 그들은 같은 공간, 같은 시간에 있지만 분노를 지각하고 감각하는 단면에서는 밀드레드와 완전히 다른 분면에 존재한다. <가려진 시간>에서 비쥬얼적으로 잘 표현해낸, ‘존재하는 세계’와 불과 한꺼풀 다를 뿐인 세상인 셈이다. 그래서 밀드레드의 분노는 항구적이다.


슬픈 사실은 안젤라의 죽음이라는 사건 자체가 촉발했을 땐, 비록 그 정도의 깊이가 다르다할 지언정 분노의 시제는 대중-적어도 에빙의 모두-사이에서 어느 정도 어긋남이 없었으리란 점이다. 하지만 타인의 비극은 쏜살같이 사라진다. 비극이 지닌 태생적인 비극이자, 우리가 세상을 버텨내게하는 힘이다. 타인의 비극을 내것처럼 받아들여 매일을 분노하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언제나 끝나지 않을 지옥 속에서 살아갈테니.



그런 우릴 상징하는 인물이 바로 윌러비다. 윌러비는-이 또한 슬프게도-결코 나쁜 인물이 아니다. 잊고 지워내고 슬픔에 무뎌지고 지속되는 분노를 버거워하는, 한때는 그 분노에 공감하며 안타까워했던 우리들의 대자(代子)다. 우리는 윌러비처럼 말하고 행동할 수 있다. 나의 분노에 왜 훼방놓느냐고 피를 토하는 밀드레드의 분노에 비겁하게 등을 지고, “그래도 나는 할 만큼 했습니다. 내가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아시잖아요”라고 닿지 않는 목소리로 웅얼댈 수 있다. 하지만 심장 안쪽 가슴 한켠에 묵직하게 내려앉은 녹슨 닻은 우리가 밀드레드를 마주보지 못하게 한다는 걸 사실은 잘 알고 있다. 윌러비가 쓰리빌보드를 위해 낸 한 달치 광고비나, 죽고 난 뒤에야 보낼 수 있었던 편지는 과거형으로 종결된 분노의 주인들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이자 자기변명이다. 그렇다. 변명인 걸 알기에 윌러비는 때마침 다가온 죽음에 기대어 자신의 최대한을 힘껏 외칠 수 있었다.


현재형인 밀드레드의 분노와 과거형으로 종결된 윌러비-우리-의 분노를 이어주는 인물이 딕슨이란 점은 차라리 유모어적이다. 딕슨은 누구의 분노에도 공감하지 않는다. 차별주의자이고 호모포빅의 동성애자(아마도)인 딕슨은 전형적인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의 소유자고 어머니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무력한 아들의 상징이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아버지나 소파 위의 어머니가 아니라 윌러비와 밀드레드가 딕슨의 대부이고 대모인 것은 그래서 상징적이다. 윌러비와 사이에 암시된 부성애적 관계는 동성애적 동경과 어우러져 딕슨의 캐릭터를 한 번에 바꿔놓을(경찰서 화재 때 유독 안젤라의 사건 파일을 챙기고, 술집에서 아이다호의 남자 얘기를 듣고 시비를 걸어 유전자를 채취하는 따위의) 지독히 ‘남부스러운’ 형태를 취한다. 



그러나 그런 딕슨의 캐릭터성을 반대로 지켜내는 간 밀드레드와 사이에서 형성된 유사 모자 관계의 유대다. 영화의 마지막이 보여주는 버디무비적 클리셰를 쌓아가는 과정에서 적대하던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떻게 변하는지가 아주 인상적이었다. 세상의 모든 아들들은 어머니를 이해하지 못하고 철없이 상처주는데(딕슨의 어머니와 밀드레드 모두) 그에 대처하는 밀드레드의 반격은 결과적으로 아들(딕슨)이 어머니(밀드레드)를 이해하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물론 그 사이에는 윌러비라는, 개념적이고 상징적인(심지어 그래서, 보편적인 작법에서 유대의 관계 사이에서 실질적인 존재감이 없음에도 늘 무게감이 있는 존재로 그려지는) 아버지가 있다. 그리고 그 아버지는 종결된 분노, 딕슨이 공감할 수 없고 무시하고 배척하던 어머니의 분노에 밑불을 당기는 역할을 하고 있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자신의 존재를 어떻게 확립해야할 지 갈팡질팡하던 딕슨이 밀드레드에게 찾아가 안젤라 사건의 용의자를 귀띔하고 “고맙다”는 말을 들은 것, 그리고 그가 범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뒤에도 밀드레드, 그러니까 새로 얻은 어머니를 잃지 않기 위해, 그에게 인정받기 위해 아이다호의 남자를 찾아가자 제안하는 배경에는 아들이 어머니에게 바라는 유아기적이고 이기적인 인정욕구가 있는 셈이다. 그래서 밀드레드는 자신들의 여행 끝에 있는 목표, 안젤라의 죽음과는 관계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또다른 딸들, 낯설고 이름모를 딸들을 위해 떠나는 징벌의 여행에 대한 의지를 딕슨에게 재확인하고, 불분명한 대답에서 어머니의 의지를 따르는 아들의 충성 의지를 확답받는다. 



어쨌든 나는 아주 개인적인 시선에서 이 영화가 용서와 서로에 대한 구원에 관한 영화라는 평에 동의하기 어렵다. <쓰리빌보드>의 모두는 누군가를 용서할 생각도 없고 용서할 여력은 더더욱 없으며, 그리하여 용서하지 못하는 자들이다. 밀드레드도, 윌러비도, 딕슨도, 딕슨의 어머니나 배덕한 아버지 찰리, 어머니만큼 누나의 죽음에 항구적으로 분노할 수 없는 동생 로비, 그리고 백인이지만 난쟁이라 차별받고 배척받는 제임스나 윌러비의 죽음으로 부임한 흑인 서장 아베크롬비까지. 이 115분의 시간 동안 우리가 그들이 누군가를 '용서'하는 장면을 볼 수 있었던가. 분노에 찬 밀드레드가 안젤라를 죽인 범인을, 윌러비를, 찰리를 용서했나? 딕슨과 대립이 용해되는 장면은 위에서 적은 것처럼 '용서'라기보단 유사 모자 관계라는, 차라리 새로운 관계의 구축으로 봐야할 것이다. 윌러비 역시 마찬가지다. 윌러비가 밀드레드를 위해 지불한 한 달치의 쓰리빌보드 광고비가 자신을 몰아붙인 그에 대한 용서의 의미일까? 범인을 잡길 바란다는 그 말 자체는 분명 진심이겠지만 그의 행동만큼은 차라리 위트를 묻힌 조소에 더 가깝겠지. 그렇다면 딕슨이 밀드레드를 용서하나? 애초에 밀드레드가 딕슨에게 용서받을 짓을 했나?(아, 뒤늦게 생각해보니 경찰서에 불을 지르긴 했지) 어쨌든 이 영화는 순수하게 보여줄 뿐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행하는 분노, 가해자가 피해자에게(아이다호의 남자가 밀드레드에게) 그리고 피해자가 또다른 피해자에게 쏟아붓는 분노(밀드레드가 제임스에게 하듯이). 지독한 분노의 잡탕찌개고 그래서 이 영화는 시종일관 차가우면서 뜨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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