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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밋너 Jun 03. 2018

당신 마음 속 깨진 거울 파편 하나

연극  <킬롤로지>, 아버지와 아들과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것들에 대하여

 ※ 이 포스팅은 7번째 연극열전 오프닝 작품인 <킬롤로지>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여기 무대 위에 세 개의 거울이 있다. 세 개의 거울은 각각의 인물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하나는 거울을 봐야만 자신을 버텨낼 수 있는 남자의 것, 하나는 거울을 통해서만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환상으로 환생할 수 있는 소년의 것, 그리고 하나는 거울의 존재 자체를 인식할 수 없는, 거울에 아무런 자아를 비추지 않는한 실패한 아버지의 것이다. 연극 <킬롤로지>의 무대 위 거울 세 개는 그래서 곧 세 명의 인물 자체이고 인물의 자아를 들여다보는 마음의 창이다.


<킬롤로지>에 대해 쓴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단순히 이 작품이 새롭고 낯설어 기존에 존재하는 방대한 해석 사이에서 스스로의 분석을 재구성하는 치트키를 쓸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은 아니다. 등장인물은 단 세 명, 대사는 90%가 독백, 무대 디자인은 질박하다 못해 다소 심심하기까지 할 정도로 심플하다. 곰곰히 따져보면 이야기의 줄기는 명확하고 개개인의 인물을 풀어가는 서사 역시 일관성이 있다. 그런데 왜 <킬롤로지>에 대해 쓰는 것은 이토록 어려운 일일까. 극이 심오해서? 복잡해서? 사회비판적인 메시지를 마구 던져주니까? 대화가 많이 없어서? 글쎄, 세 번째로 보고 나와(이 바닥 용어로 이걸 자셋이라고 한다지) 느낀 건 그냥 우리의 삶이 너무 어려우니까다. <킬롤로지>는 우리가 눈을 두지 않으려했던 우리의 삶이고, 나와는 관계짓고자 하지 않았던 우리 밖의 삶이고, 애써 우리가 멀어졌다 외면하던 우리 내면의 파멸 서사라서 그런 거다. 극 중 알란과 폴, 그리고 데이비가 모두 자신들의 거울을 하나씩 가지고 있듯이 우리는 우리 삶 속에서 우리를 들여다 볼 거울을 가지고 있는데, <킬롤로지>는 외면하고 싶어지는 타인의 그림자를 거울에 반사된 내 모습 안에 너무나 솔직히 투영하고, 또 욱여넣기 때문에 보고 나오면 너무나 고통스럽고, 이 극에 대해 뭔가를 쓰는 것조차 어려워지고 만다. 그래서 <킬롤로지>는 경계선 너머의 인물들로 규정하고 그들의 삶을 동정할 지언정 동감하고 싶지 않았던 '일반인'들 안에 알란을, 폴을, 그리고 데이비를 심어주는 '나쁜 씨앗'이고 우리를 비추는 '유리 동물원'이다. 


데이비, 너는 그저 잡아줄 사람이 필요했을 뿐인데


누군가 잡아줬다면 그렇게 되지 않았을 아이. 아이들. 데이비는 우리가 만나는 삶 속의 모든 아이들, 비극과 희극 속의 아이들이다. 데이비의 목덜미가 움푹하게 패여있는 이유였던 메이시, 그의 여동생이 그를 잡아줬던 아홉살의 그날 밤처럼 만약 에디 랜달이 그를 불러냈던 열세 살의 그 밤에 캐롤이 데이비를 잡아줬더라면. 아니, 메이시를 선물한 뒤 알란이 도망치지 않고 그를, 그리고 캐롤을 잡아줬더라면 그토록 처참한 죽음을 맞지 않았을 데이비. 그리고 동시에 매일 밤 알란의 꿈 속에서 살아돌아오지 않았어도 될 그 데이비. 


아이들의 비극을 어른의 탓으로 돌리는 건 쉽다. 그래서 사실 대부분의-현실반영적-극들은 아이들의 비극을 완전히 어른에게 돌리는 형식의 문법을 고수한다. 아무런 잘못이 없는, 기껏해야 그 나잇대 애들이 할 수 있는 아주 사소한 실수 정도의 티끌을 가진 아이들이 그들의 부모, 혹은 부모가 아닌 어떤 어른들에게 고통받고 희생당하는 종류의 문법들. 하지만 그런 종류의 문법은 오히려 현실에 존재하는 수많은 비극의 아이들을 우리와 괴리시키는 아주 비겁한 문법임을 우린 잘 알고 있다. 흠결없이 깨끗하고 잘못없이 거룩한 아이들만 비극에서 구원받아야하는가? 보다 나이어린 아이들을 괴롭히고 왕따시킨 가해자 '아이들'은 우리가 말하는 '구원'의 대상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가? 성령처럼 거룩하게 "아무렴, 우린 너희를 이해한단다"고 말할 수 있다쳐도 소년원의 범죄자들을 상대로 우리가 똑같은 지표를 가져야하는가? 데이비는 바로 그 기점에 서있는 고발 대상이자 고발의 기점이다. 누구나 갖고 있는 아주 사적인 히스토리,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는 서글픈-서글프고 흔하지만 통념적으로 '완전무결하게 깨끗하고 흠없는' 자들만이 받을 수 있는-사회적 고해성사에 해당되지 않는 사람은 어느 울타리의 경계에 서있어야 하는가. 랜달 패거리들에게 메이시를 잃은 뒤, 아무도 그를 잡아주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을 잡아줬던 유일한 대상인 메이시를 번제물로 바쳐야했던 데이비는 정신적으로 살아남기 위해 선생님에게 의자를 휘두르고 여덟 살짜리 꼬마애의 자전거를 빼앗아 고물 자동차 앞에서 시비를 걸며 달린다. 씨발, 이게 어떻게 공평해. "엄마, 집 밖은 싸이코패스들로 가득 찬 무법천지고 난 지금 매일 밤마다 살아서 집에 돌아오는 게 기적이야!" 그렇게 말할 수 없었으니까. "엄마, 날 좀 잡아줘. 엄마가 오면 쟤넨 아무 것도 못해, 날 구할 수 있어, 아직 늦지 않았어!" 그렇게 외칠 수 없었으니까. 혼자서 데이비를 감당해야하는, 매일 밤이면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릴리벌리로'의 음악을 벗삼아 잠드는 아주 작고 작아서, 손가락으로 들어서 던져버릴 수 있을 것만 같았던 엄마에게는 그렇게 말할 수 없었으니까. 왜냐하면 엄마에게 구해달라고 말하면 엄마가 자신을 구해줘야하는데, 구해주지 못하면-구해주지 않으면 결국 상처받는 것은 데이비 그 자신이니까.


그래서 너무 어린 나이에 그 지독한 사실을 알아버린 데이비는 스스로 멸망해버렸다. 자신을 잡아줬던 유일한 존재를 잡아주지 못했고, 말없이도 잡아주던 메이시처럼 자신을 잡아주길 바랐던 엄마가 자신을 잡아주지 않아서. 물론 정말로 데이비를 잡아줘야했던 건, 잡아줘야만 했던 건 아버지 알란인데 그는 데이비의 인생에서, 데이비의 미래에서 "튀었어요, 물론 모르셨겠지". 그래서 데이비는 애초에 잡아줄 수도 잡힐 수도 없는 불공평한, 기울어진 체스판 위에서 불공평하게 죽었다.


알란, 당신은 그저 잡아줘야 한다는 걸 알지 못했을 뿐이었는데

그의 이름은 알란이다. 어쩌면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었던, 주변의 누구보다 열 배 나은 아빠가 될 수 있을지도 몰랐던, 데이비를 잡아줄 수 있었던… 그러나 결국은 실패해버린 아빠. 


냉정하게 얘기해보자면 갓 18개월이 된 아이를 두고 떠나면서도 사실 그의 마음 속에 죄책감이란 그리 크게 존재하지 않았을 거다. 이혼은(혹은 별거는) 캐롤과 그 둘의 문제였지 아직 아빠 소리도 제대로 못하는 아들에 대해선 아무 생각이 없었을 거라고. 물론 그 나이브한 마음가짐은 결국 '데이비에게 무슨 일이 있겠어?' 같은 사고방식을 베이스로 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에디가 찾아왔을 때 데이비를 밖으로 내보내던 캐롤과 같은 수준의 나이브함. '설마 우리 애에게 무슨 일이 있겠어?' 그래서 데이비는, 데이비와 같은 무수한 아이들은 "거리는 싸이코들로 가득하고 매일 밤 집에 살아 돌아오는 게 순전히 기적이라고 말할 순 없"는 거다. 왜냐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믿는 자들의 신앙을 파괴하는 게, 그들에게 뭔가를 해달라고 암시하는 게 결국 자식에 대한 책임감을 통감하도록 만들어버리니까. 자신이 '책임져야하는 인물'이 되는 것은 곧 '버리고 싶은 인물'이 된다는 것과 상통함을 아니까. 어린애들의 생존 본능이란 그런 것이다. 그래서 침묵한 아들은 세상에서 가장 처참한 방식으로 살해당했고 자식을 책임지지 못하고 방기했던 아버지는 자신의 실패만 곱씹으며 또다른 신앙을 찾는 대신 누군가의 아들을 죽이려하고, 죽은 아들을 되살려 죄책감 속에서 자신의 삶을 버텨냈다. 매일 밤 그의 꿈 속에서 되살아나는 데이비가 그보다 열 배는 나은 인간인 까닭은 자신이 얼마나 실패한 아빠였는지 뼈저리게 알고 있는 알란이 늘 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기 때문이다. 상상 속에서만이라도 아들이 나보다 오래 살았으면 하는 그 바람, 그 바람의 기저에 깔린 알란이라는 인간의 연약함. 알란은 자신이 죽음으로써 아들을 보다 나은 인간으로 만들어줄 수 있다고 믿고 싶었던 거다. 열 배는 나은 시점인 걸 증명한 그 시점에서, 상상 속에서 자신을 죽여버린 알란은 혹여라도 자신보다 나빠질 수 있는 데이비의 가능성도 죽여버린다. 그게 알란이 할 수 있는 가장 행복한 상상이고 버텨낼 수 있는 마지막 힘이다. 그 앤 언제나 옆방에서 꺄르륵대고 칭얼대고 그러다 울음을 터뜨리니까. 


얼마나 불행한가. 내가 상상으로나마 안겨줄 수 있는 아들의 가장 행복하고, 나보다 열 배는 나은 미래가 고작해야 병원 직원으로 착실하게 일하는 삶이고 폐병으로 죽어버릴 아버지와의 7주간이라는 사실이. 알란은  '숨막히는 전경이 펼쳐지는 이런 집에 수십 만 파운드를 쓰는' 삶은 상상 속에서조차 데이비에게 줄 수 없었던 거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알란이 해주고 싶었던 아주 소소한 아버지로서의 욕심은 흡사 데이비가 메이시에게 해줬던 것처럼-침대 위로 올라오게 놔두면서 그를 '버릇없이 키우는' 종류의-애정을 주고 싶었던 것뿐이라는 그 솔직한 빈곤을 인정하는 고통이다.



폴, 너는 그저 아버지의 아들이고 싶을 뿐이었는데

"

폴은 데이비와 알란 사이에서 별을 바라보는 인물이다. 별을 꿈꿔본 적도 없는 알란과, 별을 쫓아 달리지만 닿을 수 없다는 걸 너무 일찍 알아버린 데이비 사이에서 폴, 폴리만은 '별에 갈 수 있을 거라' 믿었고 신뢰받았던 인물이다. 그는 아버지의 아들이자 에단의 아버지였고, 그래서 알란이자 데이비였으며 동시에 아무도 아닌 존재가 된다. 거울을 통해 아비의 환상과 지금이 아닌 현실 사이를 오가는 데이비와 달리, 폴은 거울을 통해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확인해야만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 존재다. 왜냐면 거울 너머에 있을 아버지가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않기 때문에. '억지로 눈꺼풀을 까뒤집고 그 안을 들여다봤는데도 투지, 불꽃 이런 건 이제 없는' '혼자 어둠 속에 갇혀있는' 아버지는 결코 그와 연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영원히 아버지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아들인 폴은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채우려고 발악하는 탄탈로스처럼 스스로를 괴롭힐 수밖에 없다. 그래서 폴은 늘 거울 안에 매몰된 '폴리'와 폴리의 어깨를 짚고 자신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환영을 들여다보며 자신의 현실을 돌이킬 수밖에 없다.


<킬롤로지>에서 가장 궤변적인 모순, 그러니까 관객들이 혼란을 일으키는 부분은 바로 폴의 존재에 있다. 서로 다른 독백으로 얽혀 하나의 짜임새를 맞춰가는 <킬롤로지>에서 부자 관계인 데이비와 알란이 갖는 관계적 친밀성 없이, 그의 이야기 속 아버지의 존재와 싸워가며 혼자 존재하는 폴은 무대 위에서도 한없이 외롭다. 데이비와 폴은 피해자와 가해자의 공존인데, 그들이 겪고 당한 피해와 가해의 경험은 지독하게도 다르다. 많은 관객들은 폴을 이해하지 못하고, 폴의 아버지도 이해하지 못한다. 아버지는 할 만큼 했지, 부엉이를 보여주려던 그날 밤을 떠올려봐-하지만 그는 이집트에서 사고를 당한 뒤 어마어마한 돈을 들여 자신을 살려낸 폴에게 뭐라고 말했지? 폴의 아버지가 보여준 사랑과 훈육의 방식이 잘못된 것일까, 아니면 그걸 받아들이는 폴의 방식이 잘못된 것일까. 익숙하면서 낯선 이 부자 관계는 어쩌면 극단적으로 드라마틱한 알란과 데이비의 부자 관계보다 더 많이 현대의 우리에게 트리거를 당길 지도 모른다. 예를 들면… 그러니까 만약, 폴의 아버지 밑에서 자란 게 데이비라면? 그리고 실제로… 폴 아래에서 자랐던(아주 잠시) 에단이라면? 별이 될 수 있다고 믿었던 어린 폴리는 여전히 거울 속에 갇혀있고, 거울 밖의 폴은 끝내 아버지의 아들이 되지 못하고. 결국 폴 역시 별에는 닿지 못했다. 


하지만 폴은 알아야 한다. 알란은 알았고 데이비는 환상 속에서 알게된 그 별의 진실을. 알란의 오열 속에서 우리가 주워담을 수 있었던 단 하나의 위안을. 멸망을 계시받은 이종족의 제사장처럼, 폴의 뱃가죽에 끌을 박은 채 알란이 발견한 그 사실-죽은 거미처럼 더러운 뱃가죽 위에서 발견한 이 불편한 父子들의 히에로글리프를.


하지만 누군가는 그 배를 사랑했겠지. 니가 어떤 인간이라도 널 사랑했을 거야. 부모는 자식한테 그런 법이니까. 자식이 아무리 끔찍하게 굴더라도 전부를 주는 게 사랑이니까. 언젠간 그 사랑에서 멀어진다고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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