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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밋너 May 26. 2016

祭亡'Leslie Cheung'歌

매년 4월 1일이 되면 우리는 <만우절> 아닌 당신을 떠올린다

영화 <해피투게더(춘광사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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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싯적엔 생각보다-혹은 지금보다- 많은 남자들을 사랑했다. 같은 금발이라면 제임스 딘보다는 리버 피닉스였고, 그래서 잠시 조니 뎁을 싫어하기도 했다가 랭보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분리할 수 없게 만든 토탈 이클립스를 본 뒤에는 아마 그만큼 아름다운 남자를 찾기 어려울 거라 생각하기도 했었지. 곽부성보다는 여명이 좋았고 테이프 하나 사서 들을 돈이 없었던 코흘리개, 국딩에서 초딩으로 진화하던 그 시절에는 TV에 나오는 서지원이 너무 예뻐서 넋을 잃고 보기도 했다. 은비가 내리는 나라와 인어공주를 위하여에 나오는 서지원보다 TV 속 서지원이 더 좋았을 정도로(이건 매우 중요하고 놀라운 사실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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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중에서도 단연코, 장국영은 특별했다. 너무 쫀쫀한 머리끈을 팔목에 끼운 채 하루 종일 돌아다니다가 집에 와서 씻기 위해 무심코 풀어내면 살갗에 파고들어 남은 자국들, 꽉 조여든 울혈같은 그 자국들처럼 장국영은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에게 그런 식으로 자신의 자국을 남겼다. 아버지가 내게 남겨준 몇 안되는 좋은 것들-책장을 가득 채운 LP판과 무협지들 그리고 만화책과 담배 따위-중에서도 어린 시절부터 야하고 잔인한 걸 좋아했던 못되쳐먹은 꼬마였던 나는 김용과 와룡생의 소설들을 탐독하며 초딩 시절을 보냈고, 그래서 TV에서 <영웅문>을 해줬을 때 브라운관 앞에 찰싹 달라붙어 그 영화를 봤다. 시작은 그렇게였다.


영웅문의 양과는 참 잘생겼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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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과를 연기한 장국영은 참 잘생긴 사람이었다. 거기까지는 그렇게만 생각했다. 그런데 <천녀유혼>의 영채신은 너무 예뻤다. 물론 왕조현만큼은 아니지만 사람이 너무 예쁘더라. 그러다가 <신 최가박당>을 봤고 TV에서 더빙판으로 해주는 <종횡사해>를 본 다음에 혼란에 빠졌다. 결정타는 <영웅본색>이 아니라 <아비정전>이었다. 리버도 그랬고 어린 시절의 디카프리오도 그랬지만 나는 저렇게 온몸이 슬픔으로 뭉쳐있는 것 같은 표정을 지을 수 있는 사람을 처음 본 기분이 들었다. 아니, 막연한 슬픔의 덩어리가 아니라 뭔가 모호한 결정체들. 각설탕처럼 뭉친 감정들이 온몸 곳곳에 퍼져있어 누군가와 닿기라도 하면 금세 녹아버릴 것 같은 사람. 영화 속 장국영은 그런 얼굴을 한 채 총을 쏘고 담배를 피우고 사랑을 하고 또 죽었다. 정말 신기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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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얘기했으면 내가 장국영 영화 중에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 <춘광사설>과 <패왕별희>일 거란 사실 정도는 누구나 짐작할 수 있겠지, 하하. 나는 그래서 매년 4월 1일이면 나만의 쁘띠 영화제를 한다. 청불 딱지를 몰래 봐야했던 중딩 시절, 그나마도 적나라한 씬은 모두 삭제되어버린 그 우울한 화질의 비디오 테이프를 구해 부모님이 이혼하고 형이 가출해버린 친구의 18평 아파트에서 빨지 않은 이불을 덮어쓴 채 담배를 피우며 보던 시절을 추억하며, 그 때 나의 왕이고 여왕이고 동시에 전설이자 한 폭의 그림 같기도 했던, 프로마쥬 기법의 벽화같은 그 남자를 매년 4월 1일마다 찾는다. <춘광사설>을 보고, 마음 내키는 대로 그가 나온 다른 영화를 한 편 골라본다. 시간이 안되면 <패왕별희> 한 편으로 끝내기도 하고. 그런데 어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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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제는 그러지 못했다. 나는 1일의 밤에 한라산을 마시며 사람을 만났고, 서로의 일상에 닥쳐온 소소하고 거지같은 불안과 불평과 불행들을 동정하고 있었다. 밤의 유리창 너머로는 이슬만도 못한 잡념들이 떠다니고 길거리에서, 좁고 허름한 클럽 안에서 산소를 지불한 대신 이산화탄소로 서로의 입안을 오럴하는 기분에 휩싸인 채 한참을 헤매다가 집에 돌아와서야 탄식처럼 "레슬리"하고 불러본 것이다. 4월 1일이 다 지나간 후에야, 흡사 미처 기억하지 못했다는 듯 그래서 보지 못했다는 듯 스스로를 기만하는 기분에 빠져들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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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어제는 도저히 영화를 볼 기분이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변명하자면 그런 거라고 말해야할 것 같은 강박. 그러나 의식은 습관이 되고 인이 배기는 것과 같아 나는 기어코 오늘 <춘광사설>을 다시 한 번 보고야 말았다. 나는 아휘, 너는 보영. 한 때 그렇게 생각했던 사랑인 줄 알았던 감정들은 앞자리수가 바뀐 해가 되자 나는 보영, 너는 아휘로 바뀌었다가, 다시 앞자리수가 바뀐 나이가 되면서 아휘는 아휘, 보영은 보영... 그런 식으로 자꾸만 변해갔다. 탱고를 추고 주먹질을 하고 섹스를 하고 서로에게 분노하고 그리움과 증오와 사랑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엉망진창으로 매달려 집착하다가. 뭐 그런 것들, 꾸꾸루꾸꾸 팔로마의 멜로디가 흐르는 이과수 폭포 속으로 뛰어내리는 보영의 하늘거리는 모습 같은 걸 상상하다가 무심코 하늘을 박차고 뛰어내리는 레슬리, 장국영의 모습이 겹쳐져 괜히 담배를 피우거나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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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도 여전하다. 이런 병신같은 문장이 성립할 수 있다니, 아직도-영원하다 따위의. 그런데 그것 밖에 없다. 인간은 쉽게 변하지 않는 법이다. 장국영은 더이상 세상을 사랑할 여력이 없어 세상과 이별했다. 나는 그게 쭉 궁금했던 것이다. 세상을 사랑할 수 있는 종류의 인간이었을까, 그런 건 가능한 것일까. 보영이 떠난 방, 아휘가 없는 그 방에 흩날리던 커튼과 화려한 듯 천박하고 천박한 듯 우울하던 그 벽지의 색깔, 녹이 슨 철제 침대의 다리와 공동 주방, 야시장 안쪽 국수를 말아먹던 그남자가 본 사진 한 장. 아휘는 보영에게, 보영은 아휘에게, 그리고 아휘에게 장이, 장이 아휘에게 그랬던 것처럼, 구름 사이로 잠깐 비쳤다 금세 사라지는 그 햇살(春光咋洩) 같은 시간은 인생에 어쩌면 한 번 뿐인 것이다. 착각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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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국영에게 세상은 춘광사설이었던 걸까. 죽어버림으로써 세상을 더이상 사랑할 수 없다고 선언한 남자는 그렇게 세상으로부터 영원히 사랑받는 남자가 되었다. <자객 섭은낭>에서 장첸의 얼굴을 볼 때마다, <색, 계>에서 탕웨이의 수북한 체모 아래 정갈한 음욕을 연기하던 양조위를 볼 때마다 나는 고통스러워진다. 장국영이 준 영원은 때로는 그런 식으로 잔인하고 그래서 감사하다. 쉰 일곱의 장국영이 연기하는 고뇌에 젖은 공산당원 따위를 보지 않을 수 있어서, 볼 수 없어서 기쁘고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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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늦은 속죄에 대속은 없다. 그래서 보고 난 뒤가 더 고통스러운건가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년에도 레슬리의 영화를 보겠지. 패턴을 바꿔봐야겠다. 내년에는 <가유희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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