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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밋너 May 26. 2016

고통의 사흘과 욕망의 <채식주의자>

폭력의 그늘 아래 발아한 욕망의 컨텍스트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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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스러운 사흘의 시간이었다. 온화하기 때문이 아니라 비겁하기 때문에 나는 문제를 직시하고 파헤쳐 도려내는 것을 즐기지 않는다. 하지만 때로는 그래야 할 때가 있고, 그런 순간이 오면 나는 내가 비겁함으로 도피하는 사이 본질에서 멀어져 위성처럼 그 주변만 휘휘 돌고 있었음을 알게 돼 끔찍한 기분에 빠져든다. 그러나 그보다 더 끔찍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끔찍함을 아는 척하는 것으로 덧발라 어떻게든 뭔가를 끄집어내야 한다는 강요다. 누구도 내게 그렇게 강요한 적 없지만 그렇게 해야만 하는 고통. 그래서 나는 때로 훌훌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모르는 것에 대해 망설임 없이 쓸 수 있는 허구의 세계를 갈망하며 내적 자살을 꿈꾼다. 농담 삼아 하루에 세 번 읊어대는 "퇴사하고 싶다"는 배부른 투정은 보통 그런 음울한 감정의 발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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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전, 일을 하다 말고 선잠에 빠졌을 때 묘한 꿈을 하나 꾸었다. 어떤 것이 묘하냐면, 아무 맥락 없는 희고 푸른 이미지 사이로 지금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 어떤 것들과 사람들이 뒤섞여 덧그려지고 뭉개지고 있는 그 모습이 매우 묘했다. 꿈이라는 것이 대체로 그렇듯 시각으로 지각하지 않고 뇌의 어딘가에 남아있는 잔상들만 어렴풋이 떠오르는 법인데, 이 꿈은 특이하게도 그 '묘함'만이 세포 곳곳에 남아 여기저기를 흘렀다. 잠에서 깨어 입맛을 다시며 시계를 보고, 출장을 위해 타야 할 버스를 한 대 놓쳤음을 깨달은 뒤 나는 가방에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넣고 터미널로 향했다. 버스에 타서 빵 한 조각으로 끼니를 때우고 최소한의 화장을 한 뒤 써야 할 것들을 마감하고, 책의 첫 장을 펼쳤다. 긴 이틀이 될 첫 문장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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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건대, <채식주의자>를 이제야 읽기 시작한 건 역시 맨 부커 상의 영향이다. 철저히 개인적인 취향 이유로 한강의 소설을 즐겨 읽지 않았었는데 맨 부커 상 수상 이후 동생이 한강의 책 두 권(<채식주의자>와 <소년이 온다>)을 구매했다. 내 돈으로 산 것도 아니니 읽어보는 건 나쁘지 않겠지, 안일한 마음으로 집어 들어 방금 전, 출장길에서 돌아와 집의 침대 위에 누워해야 할 일을 마무리짓고 난 뒤 마지막 문장까지 모두 읽어치웠다. 경계를 넘기 위해 아사(餓死)를 꿈꾸는 영혜의 욕망과 닮은 듯 판이하게, 그가 있는 경계 안으로 진입하려는 나의 욕망은 문장을 폭식하는 것으로 발현했다. 구태여 시간을 추리자면 여섯 시간 동안 단어를 낱낱이 분해하고 잘 절인 뒤에 양념하고 잘게 찢어 씹어 삼키는 그런 노력들 말이다. 하지만 "땀구멍 하나하나에서" "당신 몸에서 고기 냄새가 나"서 남편의 손길을 피하던 영혜처럼, 나는 그 문장과 단어 그리고 행간 사이사이에서 독하고 역한 비린내를 맡으며 고통스러울 정도의 공복감을 느꼈다.


영화 <채식주의자>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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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영혜), 욕망 자체를 욕망하고자 하는 욕망(언니의 남편), 욕망을 억눌러야 한다는 욕망(언니). <채식주의자>는 욕망이 그려내는 점층적인 파괴와 그 파괴의 기저에 자리하고 있는 폭력을 통해 우리 스스로 내면에 키우고 있는, 혹은 털어내지 못한 공포를 선뜻하게 보여준다. 어느 날 땅거미가 지는 골목길 어귀에서 빼빼 마른 일곱 살 여자아이가 치마를 걷어올려 말라빠진 허벅지 안쪽에 굳어있는 생리혈을 보여주는 것과 비슷한 종류의 이질적이고 처연한, 동시에 그로테스크한 공포. 아버지의 강압과 폭력, 그리고 평균율의 사회에서 무언가 형언하기 어려운 평범을 강요당한 채 살아왔던 영혜의 삶은 그가 손목을 긋기 전에도 이미 충분히 상처 투성이었다. 드라마틱한 불행-불치병이라거나 파괴된 가족의 서사, 찢어지는 가난 속에서 느낀 우울함-이 아니라 태어난 순간부터 살아온 삶의 궤적 곳곳이 그렇다. 영혜의 남편은 "그녀에게 특별한 매력이 없는 것과 같이 특별한 단점도 없어 보였기 때문"에 그와 결혼한다. 영혜의 형부는 "여인(영혜)의 엉덩이 가운데에서 푸른 꽃이 열리는 장면"에 충격당했고 "모든 욕망이 배제된 육체"의 모순에 빠져 그를 욕망한다. 그리고 언니는 "(영혜의)허깨비 같은 몸뚱이를 세차게 흔들고, 패대기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면서 자신이 버리고자 했으나 버리지 못하고 눌러 삼켜야 했던 것들 사이에서 줄곧 억눌려왔던 자신의 욕망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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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함이란 얼마나 많은 폭력을 감내해야 얻어낼 수 있는 것인가. 그리고 폭력은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격렬하고 난폭한 것을 지칭하지만은 않는다. "싫...어...! 먹기 싫...어...!"라고 외치는 "영혜의 얼굴을 고정시키"고 "그녀의 팔을 붙잡아 제지하"며 "보호사의 억센 두 손아귀에 움푹 꺼진 두 뺨이 잡히"게 하는 그런 모든 것들이 폭력이다. 평균율의 선 위를 달리는 강요의 폭력은 채식주의자의 뺨을 때려서라도 억지로 고기를 욱여넣는 것, 내 몸에 꽃을 그려가며 너와 성교하는 것, 그리고 조숙함이 아닌 비겁함으로 성실함을 선택하는 것 모두가 해당되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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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慾望)의 사전적 정의는 '부족을 느껴 무엇을 가지거나 누리고자 탐함, 또는 그런 마음'이다. 라캉은 욕망이라는 단어를 분절해 욕구(慾求)와 분리시켜 조금 더 확대한 개념으로 사용하는데, 나는 <채식주의자>의 욕망은 라캉의 언어에 보다 닿아있다고 생각한다. "...꿈을 꿨어" 그리고 "냉장고에 그것들을 놔둘 수가 없어, 참을 수가 없어"라고 말하는 영혜의 말에 담긴 언령(言靈)은 그 자신을 분해하고 파괴해 무욕의 상태로 이끌려한다. 그리고 영혜로부터 촉발된 욕망의 파고는 비록 그 높낮이가 다를지언정 주변에 확연한 영향을 미친다. 나도 모르는 새에 묻어두었던 상처받은 내 욕망, 꽁꽁 숨겨두었던 나의 상처, 그 위에 딱지처럼 내려앉은 트라우마를 쫓게끔 만들어 "거울 속의 왼쪽 눈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얼른 손을 들어 피를 닦아냈지만, 거울 속의 그녀는 어쩐 일인지 손을 움직이지 않고, 선혈이 흐르는 자신의 눈을 우두커니 들여다보고 있을 뿐"으로 만든다. 그토록 많은 새를 날려 보내고도 날 수 없었던 언니의 남편이나 지우를 버리지 못했던 언니, 그리고 나무가 될 수 없었던 영혜처럼, <채식주의자>와 우리는 구조적으로 완전히 충족될 수 없는 욕망을 타자를 통해 갈음하며 평균율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무익한 짓을 반복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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