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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밋너 May 29. 2016

우리, <캐롤>할래?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너와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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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드 헤인즈 감독이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레즈비언 무비를 찍었다고 했을 때, 그리고 케이트 블란쳇에게 다시 러브콜을 보냈을 때까지만 해도 나는 <캐롤>의 존재를 몰랐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동진 평론가가 라이브톡에서 한 '테레즈가 사랑한 캐롤이 하필이면 여자였을 뿐'이라는 발언이 웹상에서 시끌시끌한 아젠다로 떠오르면서 이 영화를 알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다. 최근 나는 정말로 지긋지긋한 동굴 안에 있었으니까. 그래도 아트나인에서 새해 첫 영화로 <캐롤>을 본 건 나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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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드 헤인즈는 <파 프롬 헤븐>을 찍을 때도 동성애와 인종차별이라는 주제를 다루기 위해 영화를 찍은 게 아니라 평범한 여성의 천국(인생)이 무너져가는 과정을 찍고 싶었다고 얘기한 바 있다. 아마 <캐롤> 때도 똑같은 얘기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파 프롬 헤븐>이 그랬듯이 이 영화 역시 레즈비어니즘을 '보편적 사랑'으로 치환하면 무가치해지는 영화임에는 틀림없다. 애초에 레즈비어니즘을 배제하고 <캐롤>을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이것은 인간에 대한 이야기, 인간이 사랑하는 이야기"라고 광역적인 해석을 내놓는다면 상당한 억지가 될 수밖에 없다. 그 때 그 시절, 이반의 삶을 즐기던 이들이 아련하고 슬픈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그저 내가 사랑한 네가 여자(혹은 남자)였을 뿐이야"라며 가슴아파하던 그런 종류의 구차한 변명 수준. 토드 헤인즈 본인이 그런 식으로 인터뷰했다는 얘기도 얼핏 본 것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캐롤>은 명백한 레즈비언 무비다. (만세!)

물론 내가 이동진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배제하고, 그에게 쏟아진 웹상의 지나친 비난(그렇다, 비판이나 비평이 아닌 비난. 혹은 과도한 조롱과 리미트를 모르는 분노조절장애식 쏟아붓기라고 해도 되겠지)은 과하다. 모든 퀴어무비가 가진 양면적인 두려움, 지나치게 아름다운 것으로 미화되거나 혹은 지나치게 구차하고 찌질한 것으로 격하되거나(정신적인 면에서 열려있는 사람이고자하는 멘탈힙스터-혹은 입스터들은 보통 외국 영화에서 전자를, 한국 영화에서 후자를 보더라). 스트레잇이든 게이든, 그 두려움의 포맷을 벗어나고 싶으면 프레임 자체를 광역화해버리면 되는 거니까. 감당하기 버거운 것들에 대해 국소가 아닌 확장으로 희석시키는 것은 흔히 있는 본능적 도피 아닌가. 뭐, 그런걸 다 떠나서 스트레잇 남성이니까-라고 일반화시켜버리면 가장 편하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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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얘기는 하나도 안하고 다른 얘기만 신나게 했군. 어쨌든, <캐롤>의 연출은 훌륭하다. 개인적으로는 테레즈가 캐롤을 사랑하게 되는 순간의 연출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이미 '한눈에 반한' 상태에서 캐롤의 차를 타고 뉴저지 외곽의 그의 집으로 함께 가는 길, 의식은 몽롱하고 주변은 흐릿하지만 그 가운데서 감각은 확장되고 너에 한해서는 아무리 사소한 부분조차 디테일하게 눈에 들어온다. 붉은 입술, 장갑을 낀 손, 뺨 위로 구불구불하게 드리워진 금발, 곁눈질하는 시야는 비네팅이라도 된 듯 프레임 구석구석에 안개가 껴있지만 그 가운데 선명한 것은 나를 사랑에 빠뜨린 너에 대한 정보. 반한 사람에게 사랑을 느끼는 장면의 연출로는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다. 전체적으로 그렇게 섬세한 연출들이 좋았고, (물론 나는 이것이 남혐이라 생각하지는 않지만)캐롤의 남편인 하지에게서 느껴지는, 이미 사랑에서 한참 멀어진 독점욕과 레즈비언으로서의 정체성과 어머니로서의 정체성을 모두 포기하지 않는 캐롤이라는 캐릭터에 대한 묘사 등은 무척 마음에 들었다.

'무조건 예스라고 말하는, 상대가 뭘 원하는지도 모르면서 수락하고 마는' 테레즈가 캐롤의 점층적인 작업(고마우니 점심살게요→집에 한 번 놀러올래요? 이번 주 일요일 어때요?→그땐 미안했어요, 저녁에 시간 있어요?→나와 함께 여행을 떠날래요?)에 응한 것은 물론 그 사랑 때문이다. 하지만 궁지에 몰린 캐롤에게 정말로, "나는 거절하지 못하는 사람이라서" 운운하며 스스로의 한심함을 탓한 것은 왜 싸움의 단초가 되지 못했는지 영 의뭉스럽다. 자신의 접근을 '거절하지 못해' 받아들였다는 고백이나 다름없는 거 아닌가? 뭐 일단 잤으니까 끝인가? 차 안에서의 그 대화에서 내가 느낀 일말의 위화감은 그런 부분이었다. 어찌됐든 기본적으로 '금발의 아름다운 백인 여성, 그것도 기품있고 교양있으며 유복한' 기득권 계층의 여성이 '숍걸'을 유혹하고 자신의 뜻대로 이끌어 사랑까지 쟁취해낸 뒤 자신의 삶 때문에 그를 버리는 이 서사의 구조 자체가 레즈비어니즘이 아니면 결코 매력적이지 않았으리라는 부분도. 앗, 그러고보니 애비라는 구 여친의 존재 덕분에 레즈비언 인세스트나 치정극 같은 현실 반영을 (필름이 끝난 후) 해볼 수 있다는 점도 구태여 좋은 점으로 꼽을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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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절주절 말이 길었지만, <캐롤>은 좋은 영화다. 하지만 케이트 블란쳇과 루니 마라라는 두 여배우간의 섹슈얼 텐션과 서로를 향한 은근한 눈빛 교환이 주는 매력이 오스카를 무릎 꿇리지 못했다는 점에는 크게 반발하고 싶지 않다. 나는 여전히 토드 헤인즈가, '기득권 계층의 백인 금발 여성은 밑바닥의 흑인(데니스 헤이스버트)을 선택할 수 없었지만, 10년 후에는 적어도 같은 백인 여성(루니 마라)을 선택할 수 있게 됐다' 이상을 넘어서지 못했다는 불유쾌한 의심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건 전적으로 비뚤어진 심기 때문이다. 다시 볼 기회가 있다면 감상이 또 달라질지도 모르지,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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