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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른달 Aug 11. 2022

두루치기는 희미해지지 않는다

드문드문 써내려가는 이야기들:제주도, 서귀포, 용이식당

지나간 후의 사랑은 아름답게 미화되고,
끝난 후의 여행은 아름다운 기억만 희미해진다.

용이식당 두루치기 1인분 7000원(현재는 8000원으로 가격 인상), 다른 메뉴 일절 없음.


렌트카를 공영주차장에 처박듯이 주차해놓고, 아침도 점심도 아닌 애매한 시간에 용이식당의 4인 테이블에 홀로 앉아 은박호일 위에서 익어가는 두루치기를 바라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비가 올 것처럼 흐린 하늘, 열 시를 지나 열한 시에 가까워가는 시간 탓에 가족으로 보이는 테이블과 커플 한 테이블, 총 두 테이블을 제외하면 손님 없이 한산한 용이식당에서 나는 짝짝이 양말을 신고 온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사람처럼 멀거니 서있었다. 올이 굵은 파마머리를 두건 속에 말아넣은 언니 한 분이 무심한 얼굴로 콩나물을 따고 있었고, 미간에 진 주름 사이로 세월의 연륜을 꺼내 나를 공격한다면 찍소리도 못하고 무릎을 꿇어야할 것 같은 할머니 한 분이 그 옆 테이블에서 무를 썰고 있었다. 아무도 손님인 나에게 관심이 없었고, 호기롭게 외친 "한 명이요"라는 말은 허공에 인수분해되는 것만 같았다. 공연히 손에 든 우산이, 아직 비가 내리지도 않는데 유난이다-라고 타박하기라도 하는 듯 머쓱해졌다. 그렇게 잠깐 아찔한 어색함 사이에서 방황하다가 기둥 뒤 테이블에 자리를 잡은 건 일종의 심리적 도피였다. 4인 테이블로 가득한 식당에 혼자 앉아 밥을 먹어야하는, 혼행객의 자기 방어. 콩나물을 따던 언니는 무심한 얼굴로 일어나 쟁반에 반찬 그릇들을 척척 담아선 내가 앉은 테이블로 걸어와 땅따먹기를 하듯 영역을 점령해나갔다. 그 박력에 굴복한 내가 다시 한 번 소심하게 "한 명..."이라고 중얼거리자 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떠나갔다. 그제야 나는 한숨을 내쉬며 물컵을 들고 정수기로 걸어갈 정도의 여유를 되찾았다. 따지고 보면, 메뉴가 한 개인 집이라 주문하는 게 큰 의미도 없을 일인데. 널린 게 자리이니 굳이 거기서 쭈뼛대고 서있을 필요 없다는 그 무심한 시그널이 내게는 방언처럼 낯설게 들려왔다.


설명이 따로 필요할까. 척척 날라져온 국과 흰 쌀밥 너머로 두루치기가 향긋한 냄새를 풍기며 익어가고 있었다. 발갛다 못해 벌겋게 젖어든 양념과 함께 지글거리며 구워지던 냉동삼겹살들은 무채와 콩나물, 김치, 그리고 마늘과 파채가 함께 투하돼 익어가기 시작하자 한층 더 향긋한 내음을 피워올리기 시작했다. 코끝으로만 음미해도 이건 아는 맛이었다. 알아서 더 견디기 어려운 맛. 숟가락이 공연히 국그릇을 왔다갔다거렸고, 젓가락은 마음만 바쁘게 무채를 집었다 놨다. 딱 봐도 숨이 죽어 먹어도 괜찮겠다 싶은 순간이 오고, 한 술 퍼올린 쌀밥 위에 불그죽죽한 고기를 콩나물과 같이 얹어 삼키자 역시나 그 맛이다. 알아서 더 맛있는 그 맛.


물론 당연한 말이지만, 그 말은 곧 특별한 맛은 아니라는 얘기가 된다. 정말 당연한 얘기지. 고춧가루에 금을 갈아넣은 것도 아니고, 두루치기는 두루치기다. 그 누구도 두루치기에 팔보채의 맛을 기대하지 않는 것처럼, 두루치기는 두루치기의 맛으로 행복을 주면 된다. 딱 7천원* 분의 두루치기가 줄 수 있는 행복. 용이식당의 두루치기는 바로 그런 맛이었다. 그래서 내 입에는 아직도 용이식당 두루치기의 맛이 남아있다.

아름다운 기억은 쉽게 희미해진다. 특별한 기억은 더욱 그렇다. 특별하기 때문에 결코 잊지 못할 것만 같은 기억들이 세월에 마모되어 귀퉁이가 너덜너덜해지는 걸 보면 슬퍼진다. 프랑스에서 먹었던 그 맛있었던 코코뱅의 맛이 지금은 희미해진 것처럼, 내게 낯설어 아름답게 남은 기억들은 커다란 파편만을 남기고 금세 희미해진다. 하지만 두루치기는 아니다. 나는 퇴근길 동네에서 두루치기 한 판에 소주 한 병을 마시며, 혹은 마트에서 떨이세일로 저렴하게 산 돼지고기 앞다리에 고춧가루를 팍팍 뿌려 양념한 두루치기를 만들며 언제든 용이식당 두루치기의 맛을 떠올릴 수 있다. 그건 흔한 맛이고 내가 익숙한 맛이며, 나를 키운 맛이고 내가 앞으로도 계속 먹을 맛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루치기의 기억은 희미해지지 않는다.


1인분에 7천원. 어느새 완연한 관광지가 된 제주에서 한 끼를 인당 7천원에 해결할 수 있는 곳은 매우 드물다. 메뉴라고는 두루치기 달랑 하나를 갖고도 용이식당이 살아남아 더 흥할 수 있었던 이유 역시 이 때문이다. 선택과 집중, 어쩌면 그런 건 아닐까. 볶음밥까지 야무지게 먹고 난 뒤 계산하고 나와 담배를 피우면서 뒤늦게 깨달았다. 아, 볶음밥 사진을 안찍었다. 항상 이런 식이다. 나는 천상 블로거를 할 위인은 못된다.


                                                      2019-05-13, 용이식당에서.


*2019년 작성한 글이라 당시 기준 가격 1인분 7000원에서 현재는 8000원으로 인상된 점 참고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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