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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른달 Aug 17. 2022

최후의 만찬은 무슨, 잔말 말고 또 옵서

드문드문 써내려 가는 이야기들:제주도, 제주, 각재기국, 정성듬뿍제주국

제주공항 국내선 흡연부스 앞에서 바라본 제주의 풍경은 조금 야속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흐렸었는데, 떠나려니 맑게 개어서.

2019년 5월 14일 오후 3시 10분. 서울로 올라가는 비행기의 보딩 시간을 10분 가량 남겨두고 나는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금세 맑아진 제주 하늘을 바라보는 내 기분은 조금 이상했던 것 같기도 하다. 마치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의 나처럼 어딘지 모르게 어정쩡한 기분이기도 했고, 제대로 간수하지 못한 마침표를 흘려서 잃어버렸는데 그걸 어디서 찾아야할 지 모르겠는 기분이기도 했다. 속도 모르고 빠르게 타들어가던 담배 불빛이 필터 끝까지 닿아 죽어가는 것을 보곤 급하게 재떨이에 비벼 끄고 나와, 다시 한 번 공항에서 보이는 시내의 풍경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끝.


그렇구나, 그제야 약간 실감하는 기분이 된다. 떠나는 날 공항에서, 내가 떠나려 하는 곳의 풍경을 뒤돌아보는 순간 그 여행의 끝이 완성되는 거구나. 되돌아보다, 라는 행위에 담겨있는 후회와 회한, 미련과 아쉬움의 함의들처럼 저 안에 있을 때는 몰랐던 감정들이 저 곳을 벗어나 내가 살던 곳으로 돌아가려는 그 마지막 순간에 집약돼 장대비처럼 마음을 두들긴다. 그렇구나, 이게 이 여행의 끝이구나.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귓가에 걸걸한 목소리가 천둥처럼 울려퍼졌다.


또 옵서, 담엔 저녁 먹엉 갑서.


그 식당은 제주공항에서 그리 멀지 않은, 삼도동의 어느 골목에 있다. 관덕정을 끼고 우회전을 해서 목관아를 지나기 전에 다시 좌회전, 소박한 네갈래 사거리길이 나오면 멈춰야 한다. 골목길이라 주차할 데가 늘 걱정이었는데 다행히 건물 옆에 공터가 있어 대충 주차하고 내려 가게 앞을 살핀다. 점심시간과 겹쳐 줄이라도 서있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오름에 오른 탓에 생각보다 늦어져 가게 안은 한산해보였다. 안도한 표정으로 문을 열고 들어서면 대번에 주방이 시야에 들어온다. 바쁘게 뭔가를 다듬고 계시거나 기대어 서서 반찬을 담고 있는 아주머니들. 4명이 앉을 수 있는 테이블은 대략 8개, 대부분의 식당이 그렇듯이 두 개씩 짝지어 놓여있고 가운데가 좀 뚫려있어 들어서는 순간 저도 모르게 왼쪽, 오른쪽을 잠깐 고민하게 된다. 하지만 혼자 온 여행객은 테이블 고르기에선 최하위 계급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나는 둘둘씩 앉아있는 4인 테이블을 피해 부엌 바로 앞 테이블의 의자에 앉았다.


볼 테면 봐라, 같은 느낌으로 속을 활짝 깐 주방. 오픈키친이니 뭐니 하는 거창한 이름이 아니더라도 이 정도면 충분하다.


가방을 내려놓고 메뉴판을 보는 척하며 잠시 짧은 고민을 한다. 제주에서 하는 마지막 식사. 그러니까, 무슨 해외도 아니고 언제든지 다시 올 수 있는 땅이 제주인 만큼 끝이나 마지막 같은 단어에 그리 연연하지 않으리라 다짐해놓고서도 번번이 이런 식이다. 마지막 식사를 뭘로 하는 것이 좋을까, 예수도 최후의 만찬 때 메뉴를 두고 고민했을까? 쓸데없는 생각들을 머리 속으로 주워넘기며 나는 장대국, 을 입 속에서 중얼거렸다가 이내 씹어삼키고 각재기국 하나, 로 주문을 마쳤다.


김치와 다진마늘, 청양고추. 마음껏 넣어먹으면 된다.


혼자 앉아 멍하니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가 코끝을 스치는 옆 테이블의 장대국 냄새에 약간 후회가 되기 시작했다. 어젯밤에 술을 진탕 퍼마시는 건데. 내게 이 식당을 추천해준 사람은 이 곳의 진가를 "술마신 다음날 숙취를 깨끗하게 없애주는 집"이라고 설명해줬고, 그에게 식당을 추천해준 사람 역시 비슷한 추천을 해줬다고 했으며... 아마도 그런 식으로 숙취에 끝내주는 집으로 입에서 입을 타고 소문이 번졌던 것 같다. 도민들이 주로 찾는다는 식당에 타지인들이 간간히 보이는 건, 원래 대체로 그런 식의 입소문이 시작이기 마련이니까. 물론 지금은 블로그나 SNS가 그 역할을 대신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사람과 사람이 서로 나누는 대화 속에서 이런 종류의 정보 공유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나중에 이어질 또다른 대화의 밑거름이 된다는 사실이 새삼 그립게 느껴졌다.


상념에 빠져있는 것을 용납치 않겠다는 듯 눈 앞에 턱턱 놓여진 반찬들.


멸치무침, 양파와 청양고추, 쌈장, 오이무침, 생선조림, 깻잎과 무나물, 그리고 쌈채소로 나온 배추. 특유의 단 맛 때문에 상추 대신 배추로 쌈싸먹는 걸 즐기는 이들이 있다는 얘기는 들었다. 호기심에 배춧잎만 만지작거리다가 젓가락을 들어 멸치를 한 입, 오이무침을 한 입, 무나물을 한 입, 생선조림을 한 입. 배가 고팠는지 반찬들이 금세 동이 날 뻔했다. 혼자 깨작대며 젓가락을 놀리는 사이 옆 테이블이 소란스러워졌다. 회사의 점심시간이라기엔 조금 늦고, 그렇다고 저녁시간이라기엔 많이 느리고. 일을 안하시는 분들이라기엔 작업복 같기도 한 옷을 입은 두 명의 아저씨가 옆 테이블에 편안한 자세로 앉아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중간중간 섞여나오는 걸걸한 사투리가 누가 봐도 도민, 그것도 토박이 같아 귀만 쫑긋거리며 내 몫의 식사를 기다리는데 아저씨들의 맞은편에 누가 털썩하고 앉아 소주병의 뚜껑을 땄다. 한라산 특유의 화한 알콜향이 단숨에 내 쪽까지 날아들었다.


날아든 소주향과 동시에 내 앞에 각재기국과 공깃밥 한 그릇이 제 자리를 찾아 내려 앉았다.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소주향의 유혹에 나도 모르게 여기 한라산 한 병이요, 하고 외칠 뻔 했으나 마침 타이밍도 좋게 나온 각재기국에 마음을 가라앉혔다. 풍성하게 올라앉은 배춧잎들을 걷어내면 그 아래 두툼한 각재기(전갱이)가 한 덩이, 뼈를 발라내고 먹어도 좋고 살을 찢어 배추쌈에 싸서 먹으면 맛이 아주 그만이다. 과음은커녕 성에 찰 만큼도 마시지 못했던 지난 밤을 아쉬워하며 숟가락을 들어 일단 국물 한 모금. 맑은 국물이 담백하고 깔끔하게, 그리고 아주 시원하게 식도를 지지고 내려간다.


도톰한 살을 발라 밥 위에 얹고 쌈장을 톡 올린 뒤 배춧잎에 싸서 우적우적 씹고, 국물을 한 숟가락 떠서 삼키면 기분이 좋아진다. 나이를 먹어서도 아니고, 아저씨들 가득한 판에서 일해서도 아니고, 그냥 내 타고난 식성이 이렇다. 국과 탕이 없으면 밥을 못 먹는 천상 한국인 입맛. 연신 후루룩 후루룩 국물을 들이키며 각재기 쌈을 싸먹다보니 코끝에 감도는 알싸한 소주향이 더욱 진해진다. 그래, 맞아. 소주랑 먹으면 정말 맛있겠다. 술마시면서 동시에 해장하겠네. 얼마나 마시고 싶으면 각재기국을 먹는데 소주 냄새가 나지?


렌트카를 몰고 다니느라 마음대로 술을 마시지 못했던 서러움이 폭발해서 공감각적 심상을 불러오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선명하게 소주향이 스쳤다. 고개를 파묻고 각재기국을 삼키다가 슬쩍 옆 테이블을 보니 원흉이 그곳에 있었다. 아까 한라산의 소주병을 땄던 아저씨-알고보니 식당 사장님이셨던 것 같다-는 소주잔이 아니라 물컵에 콸콸 소주를 붓고 있었고, 제주 사투리가 튀어나오던 그 앞의 아저씨들도 막걸리를 부어라 마셔라 하며 이른 시간부터 낮술을 즐기고 계셨다. 공감각적 심상은 개뿔, 평소 둔하기 그지 없던 내 후각은 이럴 때만 예민해져 귀신같이 옆 테이블의 술냄새에 반응한 셈이다. 슬쩍슬쩍 그 테이블에 깔린 멜튀김과 두루치기를 곁눈질하며 다음에는 꼭 누군가 동행을 구해서 저걸 먹어봐야겠다고-혼자는 먹을 수 없는 양과 애매한 가격 때문에-다짐하는데 문득 술냄새 사이로 아저씨들의 대화가 귀에 날아와 꽂혔다.


"또 졌지, 또 졌어. 어쩔라고 저러는지 도통 몰르쿠게?"

"감독을 바꿔야함서."


본능적으로 반응하고 말았다. 어제 서귀포에서 있었던 K리그1 제주-수원전 얘기다. "제주 유나이티드요?" 아무리 봐도, 아니, 굳이 눈여겨 볼 필요도 없었던 육지 사람. 그것도 혼자 와서 촌스럽게 음식 사진이나 찍어대던 여자 여행객이 갑자기 대화에 끼어드니 아저씨들은 제법 놀란 눈으로 나를 흘낏거렸다. 괜히 머쓱해진 나는 숟가락으로 각재기나 팍팍 찔러대며 슬쩍 웃을 뿐이었다. 최윤겸 감독님은 시간이 좀 필요하신 타입이라... 오래 지켜보셔야 돼요, 올해는 그냥 내려놓고 보세요. 아저씨가 허허, 하고 웃더니 다시 한 잔을 채워 벌컥 들이켰다. 제주가 원래 축구를 경허는 팀이 아니었는데. 툭 내뱉듯 던진 아저씨의 말에 앞에 나란히 앉은 두 아저씨가 또 고개만 끄덕끄덕 한다. 셋이 나누던 축구 얘기에 육지 사람인 내가 끼어들어 한참 수다꽃이 피었다. 제주도민들이 다 여기 사는데, 뭔 축구를 서귀포에서 한단마씀. 축구장을 제주시로 가져와야한단마씀. 끄덕끄덕,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어느새 각재기국을 쓱싹 해치우자 불콰해진 얼굴로 아저씨가 물컵을 가리켰다. 한 잔 하겠수꽈? 밖에 세워져 반납시간만 촉박하게 기다리는 렌트카를 생각하며 나는 아쉬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이제 가봐야지요, 비행기 시간이 금세라서요."


아쉬움에 입맛을 쩝쩝 다시던 아저씨는 술병을 들고 자신의 앞에 놓인 잔에 다시 콸콸 부었다. 주방 안에서 배추를 다듬던 아주머니가 벌개진 아저씨의 얼굴을 보고 눈을 홉떴지만 모른 척하며 아저씨는 단숨에 술을 들이키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직접 계산을 했다. 지직대며 영수증을 뱉어낸 기계를 바라보고 술냄새가 진하게 풍기는 숨을 한 번 내쉰 뒤, 아저씨가 말했다.


"또 옵서, 담엔 낮에 오지 말고 저녁 먹엉 갑서."


맛있게 먹었습니다.


가게를 나서 담배를 한 대 꼬나물고 렌트카를 이리저리 살피고 있는데, 아저씨와 함께 술잔을 기울이던 다른 두 아저씨가 이를 쑤시며 나가다가 말을 걸어왔다. 커피라도 한 잔 하고 갑서. 갑작스러운 말에 어어, 하는 사이 한 아저씨가 바로 옆의 편의점으로 쏙 들어갔다. 편커, 편커. 남아있던 한 아저씨는 주문처럼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커피는 편의점 커피가 최고지~ 하고 넉살 좋게 웃으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손에 얼음컵 세 개와 커피팩 세 개를 들고 나온 다른 아저씨가 재빨리 커피를 뜯어 아이스 커피 한 잔을 만든 뒤 내 손에 쥐어줬다. 비행기 시간이 바쁘다햄수꽈? 나는 어쩐지 아저씨가 할 다음 말을 알 것만 같았다.


또 옵서, 담엔 저 집서 술이랑 같이 저녁 먹엉 갑서.


불과 50분도 안되는 그 짧은 비행 시간 동안 기절하듯 잠들어버린 나는 김포공항에 내리자마자, 뒤늦게 제주 사투리를 검색했다. 또 올게요. 내가 해봤자 어색하고 웃기겠지만 나는 꼭 그 말을 제주의 말로 돌려주고 싶었다. 이번 여행의 끝, 내 최후의 만찬. 그러나 끝은 끝이 아니었고 최후의 만찬은 다시 돌아가는 순간 최후가 아니게 된다. 언젠가 다시 가서 먹고 싶다, 보고 싶다, 느끼고 싶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건 끝도 최후도 아니게 된다. 다시 시작할 여행을 위한 쉼표가 되는 거지. 그러니 모든 여행에 마침표는 없다. 끝은 없다. 그저 또 옵서,와


"또 오쿠다."


그 한 마디의 대답만이 필요할 뿐이다. 또 오겠다는 그 한 마디. 제주, 또 오쿠다.


그저 옆 테이블에 앉아 밥을 먹고 얘기를 나눴을 뿐인, 전혀 모르는 아저씨가 사준 그 '편커'. 감사합니다.


                                                2019-05-14, 정성듬뿍제주국에서.


*2019년 작성한 글이라 현재와 가게 외관, 위치 등이 다른 점 참고해주세요. 이전한 가게 위치는 아래 지도에 달아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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