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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른달 Aug 31. 2021

영혼의 홈 트레이닝, 책 읽기를 다시 시작하다

이제 더 이상 내 기억력은 마냥 선명하지만은 않다. 잊고 싶지 않은 문장, 잃고 싶지 않은 감정들을 노션에 정리해두는 건 이제 필수적인 작업이다.


요새 나는 잠들기 전, 페르난두 페소아의 <불안의 서>를 꼬박꼬박 한 챕터씩 읽는다. 낯설고 음울하지만 그래서 한밤에 읽기 좋은 그의 문장들은 어딘지 모르게 어두컴컴하고 축축하게 느껴지는 그 책의 제목만큼이나, 모두가 잠든 시간에 읽어야 마땅하다는 강박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이건 어디까지나 핑계에 불과할 테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해가 훤히 드는 한낮에는 어쩐지 그의 문장에 좀처럼 집중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낮에는 다른 책들을 읽는다. 며칠 전에는 오랫동안 손 안에 둔 채 질질 끌어왔던 심재경의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를 드디어 완독했다. 아직 일을 하고 있을 무렵부터 가방에 꼬박꼬박 넣어두고 이동할 때마다 보던 책인데, 전반에 깔린 심재경의 정서와 부담없이 담백하고 간결하면서도 날카롭고 따뜻한 문체에 끌리는 것과 별개로 바닥까지 떨어진 나의 집중력 때문에 거의 반 년 가까이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고 있던 책이었다. 그래서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의 마지막 페이지를 읽어내린 뒤 책을 덮고서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재활에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소요될지도 모르겠다는 막막함 때문이었다.


글쓰기를 좋아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이, 나도 과거에는 독서에 탐닉하던 전형적인 책벌레였다. 학업에 뜻이 있어 학원을 누비며 공부에 매진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딱히 어느 분야에 특출난 재능이 있어 스스로의 성장세를 가늠하며 예체능에 뛰어들 만한 가능성도 없었던 데다 수중에 가진 돈도 별로 없고 마땅한 취미 생활을 찾는 데도 어려움을 겪었던 어린 시절의 나는 일찌감치 책에다 얼굴을 파묻었다. 팔락대며 넘어가는 종이들, 그 위에 빼곡히 늘어선 활자들. 책을 읽으면 어디로든 갈 수 있었고, 무엇이든 될 수 있었고, 흔히들 하는 그런 얘기처럼 별 볼 일 없는 꼬마에게-심지어 요즘처럼 스마트폰도 없는 시대였다!-책은 굉장한 엔터테인먼트 그 자체였다. 장르도 가리지 않았다. 소설, 시, 에세이, 인문서, 만화, 동화…. 책은 어느 세계로든 단숨에 이동할 수 있는 놀이공원 자유입장권 같은 존재였고, 그 시절의 꼬마에게는 거의 포트키나 마찬가지로 경이로운 물건이었다. 그래서 나는 눈 뜨고 일어나 다시 눈 감고 잠들 때까지 그 무한한 책의 세계에 풍덩 빠져 한껏 즐겼다. 책 보는 것 가지고 뭐라하는 이들은 없었으니까. 물론, 밥 먹을 때나 화장실에 갈 때도 책을 들고 가는 것에 대해선 약간의 타박이 곁들여졌지만. 


언제부터였을까, 그렇게 빠져지내던 책과 이만큼이나 멀어져버린 것이. 한 번 책을 잡으면 앉은 자리에서 끝까지 완독해야 직성이 풀리던 꼬마가 습관처럼 신간을 사들이면서도 첫 페이지조차 넘기지 않고 책장에 처박아둔 채 '읽어야 하는데…' 같은 소리만 염불 외듯 반복하며 게을러진 것이. 아마도 일을 하고, 소위 말하는 '혐생'이라는 것에 완전히 정복당해 월급이 들어오는 날만을 기다리며 백기를 흔들게 된 때부터가 아닐까 추측해보지만 분명한 건 그것 역시 지금 돌아보면 핑계에 불과할 뿐이다. 일로 지쳐버린 몸과 정신은 책을 읽기 어려운 조건에 해당하지만, 책을 읽지 않는다는 행동을 향해 그 조건을 격발시킨 건 결국 나태해진 영혼과 게을러진 머리와 나약해진 의지의 삼위일체, 즉, 나 자신이다. 조금 더 거칠게 말해보면 결국, 생존을 위해 버둥거리는 상황에서 독서의 필요성이 대폭 감수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나는 카드빚을 돌려막듯이 오늘 하루를 살아낼 에너지를 확보하기 위해 내일과 모레의 나에게서 에너지를 끌어다 쓰고, 영화를 볼 집중력, 책을 읽을 집중력, 누군가와 진솔한 대화를 나눌 집중력을 끌어다가 금세라도 무너질 것처럼 구멍이 뻥 뚫려 있는 업무에 대한 집중력으로 전환시켰다. 그렇게 내일과 모레와 더 먼 미래의 나에게 대출한 에너지와 집중력들은-대부분의 빚이 그렇듯이-눈덩이만큼 불어난 이자를 달고 내게 데굴데굴 굴러오기 시작했다. 그 이자의 이름은 대체로 나태, 발전없음, 멍청해짐, 바보가 됨, 한심해짐, 자의식 부족, 설득력 감소, 한심함 등이었다.


문제는 이게 일을 그만뒀다고 해서 단번에 회복되는 종류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일을 그만둔 뒤 제주도에 내려가면서 책을-당연하게도-몇 권 챙겨갔는데,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나는 그 책 중 단 한 권도 완독하지 못했고 심지어 페이지를 채 두 자릿수 정도도 넘기지 못했다. 대자연의 향취에 취해서 그랬다고 변명할 수야 있겠지마는, 올라오는 짐을 챙기는 과정에서 책상 한 구석에 누가 버려놓고 간 쓰레기처럼 덩그러니 놓여있던 책들을 발견하고 내가 느꼈던 부끄러움을 온전히 변명해내기엔 역시 부족함이 있다.


건강하게 살기 위해 운동을 하는 사람들처럼, 건강하게 살기 위해 나 역시 책 읽기를 제대로 다시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도 그 무렵이었다. 천상 하지 않던 독서 노트-라고 해봤자 읽다가 눈에 들어온 구절을 메모하고, 감상을 덧붙여두는 정도지만-를 처음으로 쓰기 시작한 것도 정확히 그 무렵이다. (노션 개발자에게 축복 있으라.) 눈으로만 휘리릭 읽어 통독을 마치던 때와는 내 영혼의 건강 상태가 퍽이나 달라졌기 때문에, 나는 당뇨 환자가 매일 식후 당 수치를 기록하듯 내가 읽은 문장들과 이야기들에 대해 하나하나 기록해두며 곱씹고 되뇌어 이해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하루 10분씩이라도 운동하세요, 홈 트레이닝으로 건강을 챙기세요! 유튜브만 켜도 알고리즘에 따라 줄줄이 나오는 온갖 홈트 영상들에 붙어 있는 문구처럼, 나는 하루 10분씩이라도 책을 읽겠다는 의지의 씨앗을 참으로 어렵게도 겨우 심어냈다. 덕분에 나는 어제보다 오늘 조금 더 편하게, 재미 있게 책을 한 페이지 더 읽을 수 있었고, 이건 열흘 전보다, 한 달 전보다, 일년 전보다, 또 한창 일을 할 때의 나와 비교하면 제법 예전에 좀 더 가까워진 모습이 틀림없었다. 아직도 내 영혼의 홈 트레이닝은 갈 길이 멀었지만, 어제와 비교했을 때 오늘 책장을 넘기는 손가락이 조금 더 경쾌하고, 그제와 비교했을 때 오늘 문장의 속도를 따라가는 것이 조금 더 빨라지고, 책을 장식처럼 들고 다닐 무렵과 비교했을 때 책 읽기에 느끼는 즐거움이 되살아나는 기쁨은 그렇게 매일매일이 비교급으로 성장하는 중이다. 이렇게 쓰다 보니 궁금해지는 것, 운동도 이런 느낌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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