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홍글씨와 학습된 공포
모든 이야기에는 시작점이 있습니다. 첫 번째 이야기는 제게 '주홍글씨'를 새겼던 그 고통의 시작점부터 꺼내보려 합니다. 모든 것이 무너지기 시작했던, 바로 그 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 봅니다.
어쩌면 오랜 두려움의 시작은 아버지였는지도 모릅니다. 때론 폭력적이고 야비했던 아버지의 그림자는 세상의 모든 어른 남자를 어렵고 무서운 존재로 만들었습니다. 사람을 좋아하는 제 본성을 숨긴 채, 저는 늘 긴장하고 겁먹은 아이처럼 살았습니다.
조직의 회식 자리가 유독 불편했던 이유, 남들보다 일찍 결혼이라는 방패를 찾았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아이 셋을 키워낸 내공이었을까요. 마흔이 넘어서자, 저 자신도 몰랐던 잠재력이 깨어났습니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진심으로 즐거워지기 시작했고, 두려움에 떨던 주변인에서 어느새 관계의 중심에 서 있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남편의 의심은 바로 그 지점을 집요하게 파고들었습니다. 어떤 불륜의 실체가 있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뭔가 있겠지'라는 의혹의 눈초리였습니다. 정작 본인이 술로 일으켰던 크고 작은 문제들을 수습하는 것은 늘 제 몫이었음에도, 그의 의처증은 공공연하게 저의 평판을 갉아먹는 무기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사회적 매장이자 인격살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인격살인은 거창한 사건 속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때로는 아주 평범한 일상의 소음 속에서, 소름 끼치도록 조용하게 이루어졌습니다.
그가 설거지를 합니다. 다른 방에서 책을 읽다가도, 아이의 숙제를 봐주다가도, 나는 그 소리를 알아차립니다. 싱크대에서 물이 쏟아지는 소리, 그릇이 서로 부딪히는 날카로운 ‘달그락’ 소리. 보통의 가정이라면 안도와 고마움을 느껴야 할 그 평범한 소음이, 내게는 불안의 사이렌처럼 울립니다.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고 심장이 서늘하게 내려앉습니다.
그의 설거지는 무섭습니다. 나는 이미 학습되어 버렸습니다. 그의 저 친절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른다는 것을. 그의 설거지는 순수한 호의나 분담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분노의 전조이거나, 다가올 비난을 위한 명분을 쌓는 교묘한 행위였습니다.
육아휴직 시절이 떠오릅니다. 아이들을 돌보느라 파김치가 되어 설거지를 남겨두고 잠들면, 새벽같이 출근하던 그가 설거지를 하고 나갔습니다. 그리고는 사무실 동료들에게 자랑처럼 늘어놓았습니다. 그의 말 한마디에 밤새 이어진 나의 고된 육아는 흔적도 없이 지워지고, 나는 순식간에 게으른 아내가 되었습니다. 그때는 그저 그러려니 하고 넘겼습니다. 하지만 이제 와 돌이켜보면 그것은 나에 대한 배려가 아니었습니다. 나의 공을 감춰 자신을 ‘가정적인 남편’으로 포장하는, 무서울 정도로 치밀한 자기 연출이었습니다.
나는 이제 어떤 상황을 그렇게 단순하게 보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고맙다’라고 생각하는 회로가 내 안에서 완전히 망가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성난 ‘달그락’ 소리는 그릇에 묻은 기름때가 아니라 나를 향한 비난처럼 들립니다. 뽀드득 소리가 날 때까지 그릇을 닦는 그 행위는, ‘이렇게 더러워질 때까지 넌 뭘 했나’라는 무언의 질책입니다. 그의 설거지는 보이지 않는 장부에 빚을 기록하는 행위와 같습니다. ‘내가 설거지까지 했으니, 당신은 내 말에 토를 달 자격이 없다’는 암묵적인 계약. 그가 닦는 것은 그릇이 아니라, 훗날 나를 공격할 칼날입니다.
물소리가 멎으면, 집안에는 더 무서운 정적이 찾아옵니다. 폭풍전야의 고요함. 나는 그의 설거지 소리를 들으며, 보이지 않는 위협에 홀로 맞서는 법을 익혀야만 했습니다.
이런 보이지 않는 위협이 일상이 되었을 때, 저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혼란 속에서도 일상을 살아내고 있던 저에게 장기교육(2021년)이라는 생각지도 못한 좋은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그 교육을 신청하고 준비하는 과정에서 애써 묻어두려 했던 그의 의심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면서, 저는 그와의 대화를 통해 그의 진심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혼을 결심했습니다.
2021년 1월 3일, 더 이상 이 인격살인을 묵과할 수 없다고 다짐했던 그날의 기록입니다.
혼란스럽다. 잠을 잘 수가 없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가슴 답답함인가. 가슴이 저리는 듯한 아픔, 마음이 아픈 것을 넘어서 육체까지 아파오는 기분 나쁜 통증. 이러다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불안감, 마음의 고통으로도 죽을 수 있겠다는 막연한 두려움.
삶을 견뎌내며 단단해졌다고 생각했지만, 나에게도 무너지는 부분이 있다. 건드리지 말아야 하는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아 단단한 흉터로 자리 잡지 않은 그 여린 부위가 있단 말이다.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다. 겉으로 표현하지 않아도 느낌으로, 분위기로, 뉘앙스로 파악되는 속내가 있다. 그것은 실체가 없고 단지 느낌일 뿐이라 애써 외면했지만, 그 속내가 누군가의 입에서 나오는 순간, 그것은 그 사람의 내면화된 진실이 된다. 진심인 것이다.
보고 싶지 않았던 그의 진심을 또 마주하게 되었다. 그것은 파괴력이 뛰어나 내 존재의 근간을 뒤흔들고 나를 무너뜨린다. 하지만 이제는 무너지지 않겠다. 나는 나를 중심으로 모든 것을 다시 생각하고 다시 구성한다. 과거의 일을 되풀이하지 않겠다.
기억이란 것이 고작, 내가 남자랑 놀아나 아팠을 때 병원에 데려다준 것, 그걸로 자기 할 일을 충분히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는 아이 셋을 연달아 낳고 약해진 몸이 신호를 보내 응급실을 세 번 오가고 2주를 입원했던 때다. 나는 한 달을 알 수 없는 병명으로 앓았다. 그런데 그는 병문안조차 오지 않았다.) 내가 기억하는 수많은 깊은 상처들, 십수 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그 큰 사건들을 그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의 논리는 간단하다. 나는 회식 자리에서 남자들과 어울리고 제대로 해명하지 않은 '문제 있는 여자'이므로, 그 모든 것을 덮을 만큼 큰 죄를 지었다는 것. 그래서 망신당하고 손가락질당해도 싸다는 것.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그것뿐이다. 거기엔 나란 인간의 존엄성, 나의 고통, 내가 감당해야 했던 왜곡된 시선 같은 것은 없다.
끝난 것이다. 아니, 우리 둘만의 관계는 이미 과거에 끝났을지도 모른다.
결혼이란 걸 했으면, 아이를 낳고 남들처럼 살아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직장과 가정이 하나로 연결된 부부 공무원에게 이혼은 치명적이니까. 좁은 지역사회에 얽힌 부모님의 인맥, 누구의 딸, 누구의 사위로 알려진 관계들. 나의 이혼은 엄마의 몇 안 되는 자랑거리를 앗아가는 치명적인 상처가 될 테니까. 그래서 버티고 또 버텼다. 그 속엔 내가 없었다. 나는 나의 책임을 다하고 의무를 다하며 인생을 숙제처럼 해치우기에 급급했다.
당신만을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그때는 우리 둘 다 힘들었다. 우리의 삶은 전쟁이었다.
우리는 전쟁터에서 함께 살아남은 전우. 전우애가 싹터야 마땅한데, 어느 정도 안정이 되자 우리는 총구를 서로에게 겨누고 있다.
이제 당신에게 비난의 화살을 퍼붓던 나에게 자유를 주고 싶다. 당신이 준 상처로 괴로워하고 당신을 공격하는 나를 해방시켜 주고 싶다. 각자로 돌아가자. 당신은 당신 자체로 괜찮은 사람이다. 나에게 영향을 주는 당신은 악의 덩어리지만, 그것은 순전히 나의 입장일 뿐이다. 당신에게 나 또한 가증스럽고 미운 대상일 테니, 서로 그만 미워하기 위해서라도 여기서 우리의 부부로서의 관계는 끝맺는 게 좋겠다.
우리는 세 아이의 부모이니까. 아이들을 함께 키워나간다는 공동의 목표만으로도 충분하다. 이제 서로에게 총구를 겨누는 걸 멈추자. 오늘로써 너를 공격하는 일 따위는 더 이상 하지 않겠다.
세상은 나를 더 비난하겠지. 자식도 버리고 이혼하는 나쁜 년이라고. 온전히 감수하겠다. 내가 나로서 떳떳해야, 나의 아이들에게 나눠줄 사랑이 생길 수 있다고 믿는다.
엄마의 죽음을 통해서 절실히 깨달았다. 중요하지 않은 일에 집착하지만 결국 죽음 앞에선 아무것도 가져갈 수가 없다. 내 인생에 선물처럼 주어지는 이 순간순간, 나에게 진정 소중한 존재들에게 따뜻한 사랑과 배려를 온전히 베풀고 가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내가 나를 사랑해야 하고, 가장 가까운 곳에 적이 있어서는 안 되겠다. 나의 자존감 도둑을 내 보금자리에는 들이고 싶지 않다.
무조건적인 사랑, 든든한 내 편이 필요했다. 내가 사람을 죽였다 해도 ‘네가 오죽했으면 그랬겠냐’고 말해줄 사람. 그 사람이 나의 남편이길 바랐다. 하지만 나란 사람의 본질을 부정하고, 신뢰하지 않고 비난하는 사람과 더 이상 관계를 유지하고 싶지 않다.
나의 아이들은 나를 이해한다. 나를 좋은 사람이라고 한다. 그거면 됐다.
내가 더 무너지고 망가져서 아이들에게 안 좋은 모습 보이기 전에, 우리 관계를 끝내도록 하자.
그동안 당신과 맞지 않는 나와 살아주느라 고생 많았다.
이것이 그날 제가 스스로에게 썼던 선언문이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낙인 속에서 나를 부정하는 사람과 싸우며 스스로를 파괴하느니, 차라리 관계를 끝내고 나 자신을 지키겠다는 필사적인 다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선언으로 모든 것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총구를 내려놓겠다는 저의 결심은, 아이들을 위해 한 지붕 아래에서 버텨야 했던 또 다른 기묘한 전쟁의 시작을 의미할 뿐이었습니다.
이 글은 이혼을 앞두고 쓴 과거의 기록들을 바탕으로, 현재의 제가 그 시간을 돌아보며 덧붙인 이야기입니다. 평범한 일상마저 공포의 신호로 읽히던 시절, 모든 감각이 예민하게 곤두서 있던 그때, 저는 이렇게 글을 쓰며 보이지 않는 위협들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내야 했습니다.
그때의 기록을 다시 꺼내보며, 오늘의 저는 과거의 저를 다독입니다. 그리고 조용히 말을 건네고 싶습니다.
“그 시절, 잘 견뎌줘서 고마워. 보이지 않는 주홍글씨가 새겨진 채, 세상의 낙인과 그것보다 더 무거웠던 스스로를 향한 미움 속에서 고통받았던 네가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이렇게 축복받은 삶을 살고 있단다. 너는 이런 모습을 상상도 못 했겠지? 괜찮아, 이제 그 지독했던 감옥의 시간은 끝났어. 남은 것은 그저 인생의 흐름에 몸을 맡겨, 훨훨 날아가는 일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