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받은 과거를 위로하는 새로운 방법에 대하여
인생의 바닥을 찍을 때마다 나는 김윤아의 노래를 듣는다.
이혼 후 동거라는 기묘한 시간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던 2021년 7월의 어느 날도 그랬다.
그녀의 노래 ‘착한 소녀’의 가사는 ‘착한 아이 콤플렉스’로 평생을 살아온 나의 심장을 그대로 관통했다.
오롯이 나 혼자서
삭여야만 하는 괴로움
착한 소녀, 착한 소녀
나는 착한 소녀이니까
그녀는 어떻게 내 마음을 이토록 잘 아는 걸까.
깊은 슬픔과 고통을 제대로 느껴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감성일 것이다.
그녀를 만나 인생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또다시 내 안의 상처받은 아이, ‘내면아이’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과거의 상처 속을 헤매던 그날 오후, 나는 카페에 앉아 책 한 권을 펼쳤다.
제목에 끌려 선택한 책이다.『흰머리 휘날리며, 예순 이후 페미니즘』.
그 책의 한 구절이 나의 익숙했던 세계를 완전히 뒤흔들었다.
작가는 상처받은 과거의 ‘내면아이’를 들여다보는 대신, 미래의 ‘내 할머니’를 만나보라고 제안했다.
내가 할머니가 된 모습을 상상하는 것.
백발이 성성한, 지혜로운 눈빛을 가진 75세의 내가 되어,
아기 시절의 나, 10대의 나, 20대의 나, 그리고 지금 마흔다섯의 나를 차례로 만나 안아주는 것.
그저 상상만 했을 뿐인데, 울컥 눈물이 쏟아졌다.
카페에서 간신히 눈물을 삼키고 차에 타는 순간, 참았던 감정이 터져버렸다.
막연히 밀라논나, 윤여정, 박막례 할머니 같은 롤모델을 꿈꾸긴 했지만,
그 모습이 '내’가 될 것이라고는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 할머니가 미래에서 걸어와, 지금의 나에게 말을 걸어주었다.
“얘야, 고맙다. 지금까지 잘 살아주어서 정말 고맙다.”
“지금 네가 겪고 있는 모든 일들을 즐기렴. 그 나이는 다시 오지 않는단다.
어둠 속에서 홀로 울며 상처를 헤집지 마렴. 그 상처는 이미 아물었어.
그 상처 덕분에 너는 이렇게 강해졌고, 삶을 즐기게 되었잖니.”
“괜찮아. 뭘 해도 다 괜찮아.
할머니가 알려주는 인생의 비밀은, 아름다운 너의 마흔다섯을 충분히 즐기라는 거야.
네가 신경 쓰는 그 작은 결점 따위는 30년이 지난 지금 보니 아무것도 아니었단다.
그 작은 것에 신경 쓰는 에너지가 안타까워. 그 힘으로 너를 더 행복하게 하는 데 쓰는 게 어떨까?”
미래에서 온 내 할머니의 존재는, 내면아이가 가져다준 깨달음보다 훨씬 더 강렬했다.
내면아이가 나를 과거의 상처 속으로 침잠하게 했다면,
할머니는 나에게 드넓은 미래의 지평을 보여주었다.
나의 모든 과거를 기억하고, 그 모든 것을 통과해 온 나의 할머니.
그녀가 늘 나와 함께할 것이라는 믿음.
나는 그렇게 세상에 살아남아 기어이 그 할머니를 만날 것이다.
그날 이후, 나는 조금 달라졌다.
나는 이제 내가 나의 적이 되진 않을 것이다.
상처받았던 과거의 나도, 지혜로운 미래의 나도 모두 내 편이 되어줄 테니까.
나는 나를 사랑할 수 있게 되었고, 삶이 내게 주는 많은 변수들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나의 소중한 노년이, 나의 할머니가 미래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으니,
나는 오늘의 어떤 길이라도 기꺼이 걸어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