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4일, 영화가 내게 가르쳐준 것들

과거를 후회하지 않고, 새로운 사랑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 날

by 미정다움

2021년 4월 25일, 법원에서 이혼 최종 확인을 받고,

혹여나 그가 변심해서 철회신고를 할까봐

미친 듯이 차를 몰아 읍사무소 신고까지 완료한 지

나흘이 지난날이었다.


모든 것이 끝났지만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은, 텅 빈 시간 속에서 나는 영화 두 편을 보았다.

그리고 그 영화들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현재는 지루하잖아요.”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 속 주인공은 늘 과거의 황금시대를 동경한다.

하지만 그가 꿈에 그리던 1920년대로 가보니, 그 시대의 예술가들은 1890년대 벨 에포크 시대를 황금기라 부른다. 그들에게는 또 르네상스가 황금시대였다.

영화는 말한다. ‘황금시대’란 결국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환상이라고.

현재는 늘 불만스럽다. 삶이란 원래 그런 것이니까.


그 대사가 나의 어리석었던 지난날을 꿰뚫었다.

27살의 내가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부질없는 후회,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는 간절한 외침.

나는 그 환상 속에서 나를 부정하고, 어리석었던 과거의 나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날 함께 본 영화 <송 원>에서 나는 여주인공이 아닌,

그녀의 어머니 역할을 맡은 나이 든 여배우의 얼굴에 시선을 빼앗겼다.

자글자글한 주름 속에 그녀가 살아온 삶의 깊이가 보였다.

젊음의 아름다움은 찰나에 불과하지만,

오랜 시간의 축적 속에서 인생의 희로애락을 제대로 느껴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다른 의미의 아름다움이 거기에 있었다.

그 얼굴을 보며 나는 내 과거와 화해했다.


책임을 다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믿으며 나를 들여다보지 못했던 시절.

그 선택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내 인생 최고의 선물인 아이들을 만나게 했다. 후회하지 않기로 했다.

그 시절의 나 역시, 나를 위한 최선의 선택을 하며 버텨왔던 것이니까.

20대로 돌아가 다른 선택을 하고 싶다고 발버둥 치던 내가 아니라,

세월의 흔적이 켜켜이 쌓여, 나도 그 여배우처럼 깊이 있게 나이 들 수 있기를,

내 얼굴에 나의 역사를 새길 수 있기를 바란다.



“죽음이 두려우면 좋은 글을 쓸 수 없소. 진정한 사랑은 죽음마저 잊게 만들지.
두려운 건 사랑하지 않거나, 제대로 사랑하지 않아서지.”

<미드나잇 인 파리> 속 헤밍웨이의 대사는 사랑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상처받지 않으려고 새로운 시도를 멈추는 것은, 결국 삶을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사랑에는 상처가 필연적으로 따라온다. 삶이란 본래 예측 불가능한 도전의 향연이다.

또 다른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 나의 영역에 타인을 허락하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진짜 인생을 제대로 사는 것이 아닐까.


물론 나는 변했다. 과거처럼 감정에만 충실해 나를 해치지는 않을 것이다.

내 안에 상처와 갈등을 담아두는 신성한 공간, 사색과 글쓰기라는 나만의 ‘테메노스(Temenos)’를 만들었다.


이제 나는 과거의 황금시대를 동경하는 대신, 불만스러운 현재를 끌어안기로 했다.

견고하지만 완고하지 않은 사람으로, 나의 중심을 지키며, 나에게 맞는 삶의 방식을 찾아 나갈 것이다.


어제보다 오늘 더 그런 사람으로 다가가고 있다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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