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버려야만 하는 것들에 대하여
나는 이제 막 일을 시작하려는 애동무당이다. 길을 알지 못하기에, 길을 묻기 위해 '하늘맞이 무속대학'이라는 채널의 유튜브 강의를 자주 찾아 본다. 그리고 오늘 본 강의는, 지난 49년간 내가 ‘기도’와 ‘성찰’이라 믿어왔던 모든 것을 깨부수는, 서늘한 망치와도 같았다.
가장 먼저 깨부숴야 할 것은 ‘기도’에 대한 나의 낡은 관념이었다. 자시(子時), 인시(寅時)에 드리는 새벽기도, 묵언과 묵상, 참선... 이 모든 것은 나를 찾는 수행자의 길이지, 신(神)을 모시는 무당의 길이 아니라고 했다. “그렇게 기도할 거면 무당 때려치우고 절이나 교회 가라”는 그 직설적인 말 앞에서,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무당이 자기 소원을 비는 것은 괜찮지만, 그것은 신령님과 통하는 길이 아니라, 아픈 배에 빨간 약을 바르는 것과 같은 플라시보 효과일 뿐이라는 것.
더 무서운 경고는 침묵에 대한 것이었다. 묵상과 참선은 무당을 ‘벙어리’로 만든다고 했다. 신령님의 말을 입으로 뱉어내야 하는 무당이, 입을 닫고 홀로 깊은 생각에 빠지면 결국 ‘소설’을 쓰게 된다는 것이다. 나만의 상상으로 신의 말을 지어내는 것. 그것은 판타지 소설가나 영화감독이 되는 길이지, 무당이 가는 길이 아니었다.
업장 소멸? “말도 꺼내지 마라.”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살아 숨 쉬는 모든 것이 업(業)이거늘, 업장 소멸의 유일한 답은 죽음뿐이라는 것. 무당이 업장 소멸을 운운하는 것은 사기꾼과 다를 바 없다는 그 서늘한 말. 천수경을 읊으며 눈물이 날 때, 그 의미도 모른 채 끝까지 외우려 집착하지 말고, 내게 말을 걸어오는 그 존재의 울음에 먼저 귀 기울여야 한다는 것.
신령님께 "왜 저를 무당 만드셨나요?"라며 따지거나, "산에 갈까요? 짜장면 먹을까요?" 같은 질문을 던지는 것조차 모두 금지였다. 그분들은 내가 묻는다고 답하는 분들이 아니었다. 그 모든 질문은 결국 내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망상, 즉 '인의 공수(人意神託, 사람의 뜻으로 하는 신의 말)'로 이어질 뿐이며, 그것은 손님과 나, 그리고 신령님까지 모두 망하게 하는 길이었다.
그렇다면 무당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 기도는 새벽이 아닌, 해가 떠 있는 오후에, 고요한 침묵이 아닌 온몸의 감각으로 하는 것이었다. 머리가 아프고, 좋고, 싫고, 슬프고, 불쌍하고, 억울하고, 답답하고, 분하고, 서러운 그 모든 감정. 그것들을 그저 입으로 다 뱉어내는 것.
점심밥 먹고 나면 머리가 아픈 것. 그것은 잡념이 아니라, ‘그분들’이 오신 신호였다. "나 좀 알아라. 네 주둥아리를 통해 내가 말 좀 하자"며 찾아오신 것. 그때 아무 말이라도 뱉어내야 한다. 아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입으로 뱉어내는 게 중요하다. 한마디만 뱉으면, 그다음은 그분들이 이끌어주신다.
무당은 평생 '주둥아리'로 먹고사는 직업이다.
신령님의 말을 전할 때는 "~래요", "~라고 하셔" 같은 간접화법을 쓰는 순간, 나는 신의 대리인이 아닌 한 명의 '해설자'가 되어버린다. 그 순간, 나는 신이 아닌 '나'로서 말하게 된다. "고깔 쓴 할머니가 들어오신다"가 아니라, "야, 내가 고깔 쓰고 왔다!"라고, 그 순간 온전히 그분이 되어 말해야 한다. 왜 고깔을 쓰고 왔는지 질문하는 순간, 나는 다시 인간으로 돌아와 버린다.
어렵다. 지난 나의 모든 삶은 사유하고, 분석하고, 글로 쓰는 과정이었다. 나는 어쩌면 '소설가'에 더 가까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제 나는 그 모든 습관을 버리고, 텅 빈 그릇이 되어, 오롯이 신의 말을 전하는 '입'이 되어야만 한다.
그것이 내가 선택한, 무당의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