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성과 육체가 화해하던 날
신의 길은 쉽지 않다. 언니가 신내림을 받게 된 이후로 굿은 내게 꽤 익숙해졌지만, 무당이 되고 난 후 소속된 무당으로 굿판에 참석하는 것은 그 전의 경험과는 판이했다.
나는 운이 좋게도 10월부터 청주에서 열리는 굿판에 자주 참석하고 있다. 하지만 굿당에서의 일은 지난 49년간 쌓아온 나의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전혀 다른 차원의 현실과 마주할 수밖에 없다. 굿판에서 무당은, 영매이기 이전에 극한의 '육체노동자'이기 때문이다.
굿을 치르기 하루 전인 어느 날, 언니와 이야기도 나눌 겸 일찍 굿당에 도착했지만, 그곳에선 예상치 못한 또 다른 굿이 한창이었다. 그 굿이 밤 10시가 다 되어서야 끝났고, 쉴 틈도 없이 굿판을 정리하고 다음 날 있을 굿을 준비하느라 새벽 1시가 넘어서야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나는 다시 새벽 5시에 일어나 새로운 굿을 준비해야만 했다.
나의 지난 25년은 육아와 가사노동을 제외하고는 정신노동이 주가 된 삶이었다. 늘 정신의 고통보다 육체의 고통이 낫다고 호기롭게 말해왔지만, 그것은 내가 선택할 수 있을 때의 이야기였다. 49살이라는 나이에, 모든 것이 낯선 환경 속에서, 나는 다시 아이처럼 하나하나 모든 것을 배워야만 했다.
첫 번째 관문은 '교복'이었다. 한복을 챙겨 입고, 젤을 발라 머리카락 한 올 남김없이 바짝 묶어 올리는 '쪽머리'. '합리와 실용주의'를 표방하며 살아온 나에게, 이 모든 과정은 거추장스러운 구시대의 악습처럼 느껴졌다. 손으로 하는 무엇이든 아둔한 '똥손'인 내가, 내 머리 하나 마음대로 만지지 못하는 모습 앞에서부터 이미 '인간으로서의 나'는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두 번째 관문은 '청소'와 '정리정돈'이었다. 상을 정리하고, 수많은 제기를 닦고, 더러워진 공간을 치우고, 또 정성을 다해 과일과 떡, 전, 나물 등 굿상을 준비해야 했다. 시끄럽다는 이유로 청소기 대신 빗자루와 걸레만을 사용해야 하는 그들만의 규율. 물론 나는 설거지를 즐기는 편이다. 더러운 그릇이 깨끗해지는 과정을 보며 희열을 느끼는, '피할 수 없으면 즐기는' 나름의 생존법을 터득하고 있었다. 하지만 굿판의 시스템은 달랐다. 내 상식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수십 년간의 문화 속에서, 나는 선배의 가르침을 그저 따를 뿐이었다.
그렇게 묵묵히 빗자루질을 하며, 내 안의 '합리적인 나'와 '새로운 나'가 치열하게 싸우던 그 순간.
나는 문득 깨달았다. 아, 육체노동이 바로 무당의 기도구나.
자시(子時)에 앉아 드리는 고요한 기도가 아니라, 정성을 다해 몸을 끊임없이 움직이는 이 과정 그 자체가, 신령님을 향한 가장 정직한 기도임을 깨달았다.
내가 '비합리적'이라 불렀던 그 모든 과정은, '나의 생각'과 '나의 의지', '나의 상식'을 꺾고, 텅 빈 그릇이 되어 그분들의 뜻을 받아들이기 위한 훈련이었다. 나의 두뇌를 움직여 계산하고 합리적인 방식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그저 선배들의 가르침을 하나하나 내 몸에 체득해 나가는, 땀 흘리는 나의 몸을 통해 비로소 신령님과 만나게 되는 길이었다.
나는 그렇게, 애동무당으로서 가장 중요하고도 아픈 첫 번째 가르침을, 빗자루질을 하며 배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