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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리재 Nov 01. 2024

거절하지 않는다

불가항력 不可抗力 사람의 힘으로는 저항할 수 없는 힘

커피를 끊겠다고 결심한 이후, 여러 고비들을 만났다. 가장 큰 유혹은 주로 사회 생활 도중에 다가온다. 커피향이 진동하는 공간에서 마시고 싶은 마음을 참아내기란 고역스럽다. 해외 출장을 다녀온 친구가 선물로 사온 커피도 고맙지만 사양했다. 그 대가로 커피 금단으로 인한 두통, 무기력함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는데 나는 진통제도 소용없을 정도의 심한 두통에 시달렸다. 이게 맞나. 


그렇게 사흘이 지나고 수요일을 맞이했다. 매주 수요일 밤에는 설레는 마음으로 잠자리에 눕는다. 목요일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평생교육원 강의를 진행하기 때문이다. 바쁘디 바쁜 삶 속에서 아침 일찍 공부를 위해 달려온 분들이 나를 맞아주신다. 오히려 젊은 학부생들보다 열의가 넘치는 분위기라니. 나 역시 마흔에 늦깎이로 대학원 공부를 시작했다. 대학원 수업은 일주일에 이틀, 밤 11시까지 이어졌다. 그 즈음 7살, 9살이던 두 아이는 10분 간격으로 본인들의 상황을 알려줬다. 



엄마, 우리 밥 먹었어요. 엄마, 지금 양치했어요. 엄마, 우리 책 봐요.
엄마, 약 먹었어요. 우리 이제 자요. 엄마, 안 졸려요? 엄마, 사랑해요.
엄마, 운전 조심하고 내일 아침에 꼭 만나요. 



'엄마'와 '우리'가 반복되는 메세지를 보내며 아이들이 내 공부를 지지해 준 시간들. 엄마를 걱정시키면 안 된다는 결의와 다짐, 엄마를 내일 아침 볼 수 있기를 바라는 간절함이 담긴 문자들을 보면 책이 흐릿해질 때도 있었다. 독서대에 책을 올리고 교수님 눈치를 보며 아이들에게 답장문자를 보냈다. 학생의 도리와 엄마의 의무 사이, 죄책감과 나를 회복하고 싶다는 갈망 사이를 위태롭게 오가던 때였다. 주말부부였기에 대학원 가는 날은 돌봐줄 어른이 없어 두 아이가 서로 의지하며 지낸 시간이 길다. 그렇게 공부하던 중, 감사하게도 평생교육원에서 강의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와 초빙교수라는 직함을 지니게 되었다. 내가 공부한 시간과 과정도 평균에서 벗어나 있기에, 다양한 생애주기 학생이 모인 평생교육원에서 뵙는 분들에 대한 마음은 더 각별하다. 그리고 그 곳에 그녀가 있다. 


목요일 아침 9시, 따뜻하고 향기로운 아메리카노 한 잔을 건네는 그녀. 그녀를 C라 부르자. 지난 학기 처음 내 수업을 들은 C는 경쾌한 스타카토 같은 학생이다. 찰랑이는 긴 생머리와 통통 경쾌한 발걸음으로 뛰어와 질문을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6살 아이 엄마인 C는 아침 일찍, 한 시간 반을 운전해서 강의를 들으러 온다고 했다. 여러 번 사양하는 내게 어느 날 그녀가 말했다.  

"교수님, 이건 제 리추얼이에요, 리추얼. 집 근처 가까운 곳도 있지만 여기가 학생수도 많고 좋다고 들어서 일부러 한 시간 반을 오는 거거든요. 저는 아이 하나인데 아침에 정신이 하나도 없어요. 교수님은 둘 키우면서도 공부하셨다면서요. 저도 교수님처럼 계속 공부해서 제 일 하고 싶어요. 그러니 롤모델에게 드리는 작은 덕질이라 생각해주세요. 네?"   


그 때 혜성 하나가 가슴을 가로질렀다. 내가 뭐라고, 나를 이렇게 소중히 여겨주는 분들을 만났을까. 70대 어르신께서 본인이 공부할 수 있게 강의해 줘서 고맙다고 하신다. 60대 어머님이 여자라서 못 배운 한, 내 안에 맺힌 말이 뭔지 강의들으며 배우고 알 수 있어서 행복하다 손 잡아주시기도 하고. 나도 건넜던 경력단절 기간을 극복하려는 3,40대 엄마들이 아이들의 열과 밤새 싸우고 충혈된 토끼 눈으로 책을 보곤 한다. 퇴직을 준비하는 50대 신중년 세대가 이후 살아갈 절반의 인생에 대해 고민하는 마음을 털어놓는다. 이미 살아봤거나 아직 살아보지 못한 시간들을 나누며 우리 모두는 서로를 통해 자기를 확인하고 있었다.   


중간고사, 기말고사가 있는 날이면 같이 수업 듣는 분들 인원수대로 찰떡과 초콜릿, 음료를 준비해서 포장하고 나누며 시험 잘 보기를 상호 응원하신다. 점심시간에 함께 드시기 위해 싸오는 도시락 반찬은 가히 15첩 반상을 능가한다. 내 도시락을 싸오셔서 감사의 말씀과 함께 단호히 거절하기도 했다. 서운해하시는 눈빛을 보니 마음은 불편했지만 평생 누군가를 먹이고 입히느라 애쓰신 손으로 나까지 챙기도록 보태고 싶지 않았다. 아는 분은 아시겠지만 이게 말린다고 말려지는 일이 아니다. 막는다고 막히는 일은 더더욱 아니다. 늘 나누고 챙기고 먹이는 일에 정성을 다해 온 분들이 서로에게 마음을 다하는 것이니까. 그렇기에 나 역시 수강생 분들에게 간식과 음료를 주문하여 작은 마음을 나누기도 한다.  


다른 곳에서는 커피 안 마시겠다고 단번에 잘라 말했는데, 영 마음이 불편했다. 나는 수강생 단체온라인 대화방에 글을 올렸다. 

가을 재촉하는 비가 옵니다. 내일 1차 보고서 제출일인 것 알고 계시죠? 저는 며칠 전 커피를 끊었습니다. 이제 저도 건강에 신경쓸 나이가 되었다고 의사 선생님 잔소리를 들었답니다. 아무쪼록 감기 조심하시고, 내일 뵙겠습니다. 

이러면 나도, C도 서운하지 않겠지. 아침 일찍 출근하며 <슬기로운 초등생활> 채널에서 이은경 선생님의 고등 아들 키우는 어려움, 사춘기에 대한 경험과 조언을 듣는다. 엄마이기에 더 나은 '나 자신'으로 살고 싶어 공부했던 마음을 다시 다잡아 본다. 강의실에 들어서니 니트와 얇은 패딩으로 다들 옷차림이 달라지셨다. 언제나처럼 음악을 틀고 안부를 묻고 담소를 나누며 수업을 준비한다. 8시 58분, 이제 곧 수업 시작이다. 출석부를 꺼내드는 중 강의실 앞문이 열렸다. 그녀다. 어라? 그녀의 손에는 오늘도 두 잔의 커피가 들려있다. "안녕하세요!" 밝은 인사와 함께 발랄하고 리듬 가득한 걸음걸이로 교탁으로 다가온 그녀가 컵 하나를 내민다. 



교수님, 디카페인입니다!  




마셨다. 모두가 보시는 앞에서 컵을 꼬옥 쥐고 음미했다. 디카페인이 뭐냐며 물어보신 어르신들은 C의 설명을 듣고는 총명하다며 덕담(?)을 해 주셨다. 본인은 대추차를 싸 와야 하나 고민하셨다면서. 수강생들께서는 내가 커피 마시는 모습을 어린 아이 밥 먹는 모습을 보듯 흐뭇해하셨다. 불편할 수도 있는 그 순간이 이상하게 불편하지 않았다.


이 글을 쓰는 지금은 밤 10시 37분. 고요한 집에서 엄마로서도 퇴근 후, 나른하고 피곤한 상태로 오늘을 복기한다. 오늘 쓰지 않으면 그 향기가 날아가 버릴까 겁이 났다. 커피는 단순한 예의에 그치지 않을 수 있다. 그건 엄마로서,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스스로의 삶을 응원하고 배려하는 하나의 의식이 되기도 한다. 그를 통해 자기 자신의 안녕함을 묻는 리추얼이다.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한 시간 반을 운전하며 오는 길이 피곤하기보다 행복하다는 그녀의 말에서 '육아 말고 뭐라도' 하기 위해 발버둥치던 내 예전 모습이 겹쳐보인다. 우리가 나누는 커피 한 잔의 의미는, 단순한 음료에 그치지 않는다. 나도 당신과 약속한다. 우리가 서로에게 보낸 응원 덕분에, '나다움'을 미뤄두지 않고 오늘을 살겠다고. 







커피 추억 한 모금 : 커피나무의 생존 전략, 카페인 Caffeine 

어제 저의 싱숭생숭함은 걱정이었을까요, 설렘이었을까요? 소제목에 붙인 '불가항력'이었던 것은 저를 아껴주시는 분들의 마음이자, 커피를 마시고 싶은 제 마음 모두였던 것 같아요. 이토록 사람을 애끓게 하는 커피의 매력은 아로마와 카페인에 있지요. 커피나무는 생존을 위해 비장의 무기를 만들어 냈어요. 바로 카페인입니다. 커피나무꽃은 재스민과 비슷한 흰 꽃이 피고 3~4일 후면 지고 말아요. 수정은 더 짧은 시간만 가능하고요. 그러다 보니 해충은 물리치고 수분을 도와줄 벌과 나비 등을 효율적으로 불러들일 전략이 필요했죠. 어른 커피나무는 꽃에 카페인을 적당량 모아 벌과 나비가 죽지 않을 만큼 카페인에 중독시키고, 중독된 벌과 나비는 다시 카페인 있는 꽃을 먼저 찾아든다고 합니다. 아아, 제가 커피를 못 끊는 건 다 이유가 있었네요. 수만 년의 커피나무 진화의 메커니즘을 이제 겨우 40년 조금 더 산 제가 어떻게 이기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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