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라는 동물이 스스로 만들어낸 학력이란 개념은 여러 가지 선입견에 소재를 제공하고 반대로 선입견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그 선입견 덕에 그냥 ‘서울대생’과 ‘서울대 여학생’은 사실 꽤나 다른 사회적 지위(?)를 가진다. 나는 종종 내가 서울대 여학생이 아니라 서울대생이었다면 더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때만 해도 옛날 얘기 같지만, 우리 부모님은 막내딸이 정작 서울대 입학증을 받고 나자, 서울대 대신 다른 학교에 딸을 보내는 게 딸내미 인생에는 더 좋은 결정이 아닌가를 진지하게 고민하셨다. 서울대 나온 여자를 누가 데려가냐는 주변의 농담 섞인 조언들을 그저 웃어넘길 수많은 없으셨던 모양이다. 하기사 결과론적으로 서울대 나온 딸내미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마흔이 되도록 시집을 안 갔으니 부모님의 그때 걱정이 마냥 기우이지만은 않았을 수도 있겠다.
비슷한 사례들을 그 또래 서울대 여학생들은 저마다 가지고 있을 터이다. 우리 과만해도 200여 명 총원에 여학생이 고작 30명 정도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학번이 무려 사상 최대로 여학생이 많았던 경우였다. 매일 과방에 가보면 우리 과 남자애들과 미팅을 하고 싶어 하는, 손 만들면 갈 수 있는 미팅 공지 메모가 게시판 가득이었던 반면, 여학우들을 초대하는 메모는 찾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 우리와 같은 세월을 보낸 한 학번 두 학번 언니들이 ‘내 너희들만은 미팅을 시켜주리라’며 학연 지연 혈연을 모두 동원해 찾아준 기회들 덕분에 우리 반 여학우 6명은 그 멤버 그대로, 우리 학교 법대 남학생들과 한번, 의대생들과 한번, 사회대 정치학과였나와 한번, 그냥 어차피 오다가다 교양수업에서 만날 수도 있는 우리 학교 학생들과만 미팅 아닌 미팅을 했었다.
소개팅을 나가도 상황은 비슷해서, 어찌어찌 우리 학교가 아닌 아이들과 자리가 생겨도, ‘우와 서울대 다니는 여자 첨 봐요’의 유형이거나 ‘아 내가 수능 그 문제만 맞췄어도 그 학교 가는 거였는데’ 두 유형 중 하나인 경우가 많았다.
서울대생이라는 것을 부끄러워해야 하나 생각하게끔 한 첫 번째의 기억은 그 당시 강남역 나이트를 처음 갔을 때 등장한다. 관심을 보이며 잘만 접근했던 남자 녀석들이 다들 첫 질문으로 ‘대학생이에요? 어느 학교 다녀요?’라고 묻곤 했는데 – 써놓고 보니 참 웃긴 질문이다. 저런 걸 왜 물어보지? – 첫 한두 번을 ‘서울대요’라고 사실대로 답하자 분위기가 싸해지면서 먼가 어영부영 나를 떠나가는 것을 보고, 어라, 이건 뭐지 했더란다. 그래서 그다음 접근한 녀석에게 ‘xx여대요’라고 답했더니 그 녀석이 ‘에이~ 나이트서는 여자애들이 다 xx여대라고 하던데. 무슨 과에요? xxx 알아요?’라고 의심 가득한 질문들을 해대서, 졸지에 학력을 속인 거짓말쟁이가 되어 이도 저도 못하고 난감했던 기억이 난다.
하기사, 입학 후 한 달쯤 지났나, 새로 산 하늘색 원피스를 입고 과방에 들어서는 나를 보고, 테이블에서 컵라면을 먹던 98학번 선배 오빠가 잠시 정지. 조용히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뒤를 돌아 창문을 열고 밖에서 팩 차기를 하던 무리들에게;
‘우리 과에 치마 입고 오는 애 생겼다!!!!!’
라고 외쳤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할 정도이니 할 말 다했지 싶다.
심지어 교수님들도 학기 시작 무렵 수업에서는, ‘아 라떼는 우리 과에 여학생들이 정말 없었는데 말이야’로 시작하시기 마련이었으니, 그때만 해도 그런 시절이었다.
입학 초기 오티에 엠티에 술자리에 이리저리 선배들이 하라는 대로 정신없이 휩쓸려 다니다가 어느 날 같은 반 여자애들끼리 강남역에 처음 간 날이 있었다. 팔짱을 끼고 길가 리어카를 스쳐 지나가다 누군가가 ‘저 머리핀 좀 구경하고 가자’라고 하는 순간 우리 모두 문득, 아 이런 거 오랜만이다 했다. 그간 우리가 그저 ‘대학생활’인 줄 알고 급하게 받아들이려 애썼던 것들이 사실은 80프로 이상이 남자들로만 이루어져 있었던 학교에서 자연스레 만들어져 온 남자아이들 위주의 문화였을 수 있겠구나를 비로소 깨달으며 먹먹해진 것이다.
누군가의 고의였다기보다는 그냥 그렇게 세월이 변해가던 한 꼭지에서 서울대 여학생이라는 배려받지 못하는(?) 소수의 무리였던 우리들. 그래서 그런지 사회에 나와서도 제각각 자기 삶들을 꾸려나가고 있는 선후배 동기 여자들을 보면 알게 모르게 짠한 동지애를 느끼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