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소설/단편소설 01
“ 사랑은 브레이크 없는 페달을 밟는 거랑 똑같아. 올라탈 때는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있어도 일단 올라타고 나면 세우고 싶어도 세우질 못해. 결국은 가다가 운이 좋으면 어디 모퉁이라도 쳐 박히든가 그도 아님 절벽이나 강물 속으로 떨어지겠지. 난 지금 그런 브레이크 없는 자전거 위에 올라탄 거야.”
대합실 안을 가득 메운 사람들의 시끄러운 소음 사이로 그녀의 말이 마치 바로 귀에다 속삭이는 양 선명하게 들려왔다. 갈아입을 속옷 몇 가지와 간단한 세면도구, 그리고 그녀가 언젠가 한 번 보라며 내게 쥐어준 영화 DVD 케이스, 겉 옷 몇 벌이 든 12인치 작은 여행용 가방이 콘베어 벨트 위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걸 보며 공항 안내데스크 직원이 되돌려준 여권과 보딩 패스를 받아들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지금 거기로 가려 하는가?
“ 손님! 19번 게이트 32D 창가 쪽입니다. 즐거운 여행 되십시오.”
여직원의 낭랑한 목소리에도 머릿속은 여전히 멍했고, 간간이 언젠가 그녀가 내게 했던 그 말만이 반복되는 기계음처럼 되풀이되었다.
입국수속을 마치고, 방콕 국제공항 밖으로 나왔을 때는 이미 캄캄한 밤이었다. 캄보디아 국경을 넘기위해 다음날 아침까지 꼼짝없이 이곳에서 기다려야만 한다. 사방이 어둠으로 뒤덮인 적막을 깨고 캄보디아, 파타야 등지로 떠나는 여행객들로 공항은 북새통을 이뤘다. 간간이 그곳 현지 가이드들이 자신들의 손님을 찾는 피켓을 들고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조금 뒤 눈이 부리부리하고 키가 8척은 됨직한 태국인 현지 가이드 한 명이 나를 찾는 피켓을 흔들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를 향해 머쓱하게 나 또한 손을 흔들었다. 그는 내일 캄보디아 국경을 넘을 때까지 나와 동행을 해줄 것이다. 공항 밖으로 나오자, 후끈한 열대의 공기가 답답한 가슴을 더욱 짓누르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다행이다. 비는 오지 않는다. 열대몬순의 우기인 5월에 아무런 대책도 없이 이곳까지 덜컥 와버렸으니. 막막한 두려움이 답답한 숨통을 더욱 죄어오는 것만 같았다.
“ 갑자기 웬 출장이야? 그것도 캄보디아?”
“ 요즘 캄보디아에 한국 기업들 많이 진출해있는 거 당신도 알잖아. 우리 회사도 예외는 아니고. 파견 나갈 직원이 갑자기 일이 생겨서 대신 내가 가게 됐어. 한 일주일 정도 걸릴 거 같으니까 당신은 아무 걱정 말고 애나 잘 보고 있어.”
아내는 내가 캄보디아로 떠나는 오늘까지도 그녀의 존재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는 눈치였다.
아침이 되자, 짐들이 잔뜩 실린 낡은 2층 버스 하나가 우리 앞에 멈추어섰다. 쥔엔이라는 이름의 태국인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짐을 내려놓고 방콕 시내를 경유해 캄보디아 국경에 도착한 시간은 이미 잔뜩 어둠이 내린 후였다. 국경선에 사람들을 부려놓은 버스는 제 할 일을 다했다는 듯,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다시 먼지나는 길을 달려 왔던 길을 향해 되돌아갔다. 일단은 국경 근처에 묵을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어디든 상관없이 먼저 여장을 풀어야했다. 내일 아침, 날이 밝는대로 프놈펜 시내로 들어가기로 마음 먹고선.
국경 근처의 소도시는 그야말로 우리나라 50~60년대 시절을 방불케하는 광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어제밤 어둠이 가로막았던 캄보디아의 모습을 아침 햇살은 조금의 여과도 없이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여주고 있었다. 생존을 위해 국경을 제집드나들듯이 드나드는 사람들. 다 떨어져가는 슬리퍼라도 신은 아이는 그나마 양반이고, 거리엔 신발도 신지 못한 아이들이 1달러를 구걸하며 마치 앵벌이처럼 쏘다니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 나라는 사람은 어떤 모습으로 비춰질까? 생존이 아닌, 사랑을 찾아 국경을 넘는 모험을 감수하는 사람. 안그래도 정신 없던 머릿속이 그들의 모습을 보며 더 엉망이 되는 느낌이었다. 할 수 있다면 당장 날아서라도 이 곳을 속히 빠져나가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오전 7시가 조금 넘은 시간, 무작정 국경에서 프놈펜 시내로 들어가기 위해 버스에 올랐다. 많은 사람들이 짐짝과 함께 뒤섞여 겨우 두어 개 남은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국경을 넘어가야한다는 불안감에 눈이 동그랗고 얼굴빛이 짙은 참나무 같은 가이드를 향해 내가 초조한 시선을 보내자, 그는 내 기분을 알 것 같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방인인 걸 알았는지, 옆에 앉아있던 한 태국인이 말을 걸어왔다. 많은 한국인들이 앙코르와트 사원을 보기위해 이곳으로 여행을 온다는 말을 늘어놓았지만, 직직거리는 고장 난 라디오처럼 그의 말들은 소음이 되어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지금 내가 집중할 수 있는 단 한 가지는 오로지 그녀 뿐이었다. 그녀가 이곳에 왔을까? 아니 분명 왔을 거라는 확신 하나로 여기까지 온 게 아니었던가?
버스가 프놈펜 중심가로 들어서자 어둠 사이로 도시의 불빛과 과거 프랑스 식민지 시절에 지어진 듯 한 유럽풍 건축물과 중국식 건축물이 한데 뒤섞여 있는데도 왠지 영광이 지나간 도시의 잔해가 폐허처럼 음산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도시의 불빛들 사이로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전깃줄과 식민지 시대의 아픔이 채 아물지않은 듯 여기저기 벗겨져있는 프랑스식 건물들의 낡은 벽면들.
“ 프놈펜이 무슨 뜻인지 아세요?”
옆에 앉아있던 한 남자가 창밖 풍경에 골몰해있는 나의 침묵을 깨고 불쑥 끼어들었다.
“ 사실 이곳 현지인들이 다 영어를 할 줄 아는 건 아닙니다.”
그래도 그나마 자신은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 축에 속한다는 자부심이 그의 말 속에 배어있는 듯 했다. 어설픈 그의 영어에 피식 하고 웃음이 새어나오는 걸 글쎄요. 하며 얼버무리며 조소가 입 밖으로 새어나오려는 걸 얼른 틀어막았다. 나에게서 더 이상의 대답을 들을 수 없을 거라는 걸 안 때문인지 남자가 얼른 말을 받았다.
“ 프놈은 산 혹은 언덕이란 뜻이고, 펜은 캄보디아에서 흔히 쓰는 여자 이름이에요. 그래서 합치면 ‘펜의 언덕’, 뭐 그런 뜻이 되는 셈이죠.”
‘ 펜의 언덕이라?’
그의 말에 갑자기 몽둥이로 머리를 한 대 후려 맞은 듯 한 둔탁한 충격을 느꼈다. 그녀가 어쩌면 캄보디아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문이 그의 한마디에 비로소 확고한 믿음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여자의 언덕......
그래, 분명 그녀는 이곳 프놈펜에 있을 것이었다.
“ 혹시 양조위라는 홍콩 배우를 알아요?”
“ 양조위를 모르는 한국 사람도 다 있나?”
“ 그럼, 화양연화는요?그가 출연한 영화 말이에요.”
그녀는 언젠가 양조위라는 배우가 출연했다는 영화에 대해서 내게 물은 적이 있었다.
“ 화양연화가 무슨 뜻인지 알아요?”
화양연화라는 영화를 모르는 내가 그 말의 뜻에 대해 생각해본 일이 있을 리 만무했다. 내가 아무 말도 못하고 가만히 있자, 그 때 그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피식하고 웃으며 대답 대신, 내 손에 DVD 하나를 쥐어주었다.
“ 언제 아무 때고 시간 되면 한 번 보세요.”
그 때 일을 떠올리자, 그녀가 쥐어준 영화 DVD가 들어있는 여행용 가방을 움켜쥐고 있던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 아, 그렇군요. 몰랐습니다.”
남자의 말에 내가 그렇게 대답하자 그는 프놈펜이 캄보디아의 수도가 된 배경에 대해서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 이유 따위가 지금 내게 중요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가 쏟아내는 열변을 무심히 들으며 창문 밖으로 시선을 옮기자, 방사선형의 국도를 따라 도시의 불빛이 함께 움직였다. 그녀도 지금 이 불빛을 보고 있을까? 아니 살아있기나 한 걸까? 갑자기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어둠보다 더 짙게 엄습하기 시작했다.
" 저도 프놈펜까지 가는 중입니다."
가이드를 자처한 듯, 쥔엔이 미처 끼어들 틈도 주지않은 채 끊임없이 쏟아내는 남자의 말 때문이었는지 안그래도 불안하고 초조한 시간이 고역으로까지 느껴지던 것이 프놈펜의 한 호텔 앞에 도착하고서야 비로소 끝이 났다.
“ 아, 참 내일이 ‘로열 플라우잉 세러모니‘(Royal ploughing ceremony)가 있는 날이니 사남 루엉 광장을 한 번 가보시는 것도 좋을 겁니다."
막 돌아서려는 내 등 뒤로 남자의 마지막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그녀가 살아있다면, 그리고 이곳에 있다면 그녀 또한 내일 그 축제를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희망이 생기기 시작하자, 비행기를 타기 전부터 답답했던 가슴이 조금은 뚫리는 듯 시원해지는 느낌이었다.
" 프놈펜에서 씨엠 립 가는 버스는 자주 있습니까?"
" 씨엠 립은 포이펫에서 이곳으로 오는 동안 이미 지나쳐왔어요. 메콩강 근처에 가면 여행사들이 즐비하죠. 그 근처에 가면 씨엠립 가는 버스를 자주 만날 수 있습니다."
쥔엔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