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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어떤 이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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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ubia Feb 01. 2017

화양연화

창작소설/단편소설 02

긴장과 피곤으로 지친 몸을 얼른 침대 시트 안으로 밀어 넣었다가 그녀가 준 DVD생각이 났다. 볼까말까 잠시 망설이다가 꺼냈던 케이스를 도로 침대 옆 작은 탁자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긴장과 피곤으로 지친 몸은 침대에 뉘자마자 순식간에 잠의 나락 속으로 빠져들었다. 얼마를 그렇게 죽은 사람처럼 잠이 들어있었던가? 아침에 눈을 뜨니 이미 해가 중천에 걸려있는 듯, 어젯밤 미처 닫아놓지 못한 열려진 커튼 사이로 강한 햇살이 비춰들고 있었다. 눈살을 찌푸리며 방안을 한 번 휑하니 둘러보다가 이내 침대 옆에 놓인 조그만 탁자에 놓여진 DVD로 시선이 갔다. 오늘 밤엔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가 말한 그 영화를 보고 말리라. 간밤 지나쳐왔던 길을 되짚어가며 그녀의 흔적들을 찾아나서리라.


 거리로 나서서 무작정 어제 태국 남자가 일러준 로열 플라우잉 세러모니가 열리는 광장을 찾아갔다. 노란색의 화려한 전통복장을 입은 사람들이 옷 색깔과 똑같은 노란색의 왕관처럼 생긴 모자를 쓰고 손에는 쟁기처럼 보이는 도구를 든 채, 사람들 사이를 행진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곳에는 캄보디아 왕으로 보이는 자가 한 해 농사의 풍년을 빌며 제수인으로 직접 참여하고 있기까지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그렇게 존경해마지않는 시바신은 오랜 세월 곳곳에 사원을 건축하며 밤낮으로 빌고 또 빈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았나보다. 그 광경을 지켜보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의 얼굴과 남루한 옷차림, 그들의 까만 얼굴과 하얀 와이셔츠처럼 보이는 윗도리가 왠지 부조화를 연상시킨다. 그 어디에도 시바신의 자비 따위는 찾을 수가 없었다.

 북새통을 이루는 곳에서 나처럼 낯선 이방인의 모습을 혹시라도 찾을 수 있을까 싶어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삼삼오오 함께 온 여행객들을 제외하곤 홀로 축제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없는 듯 했다. 당연히 그녀의 모습 또한 찾을 수가 없었다.


 앙코르와트에 가면 비밀 궁전이 100개도 넘는 거 알아요?그리고 앙코르와트 사원이 크메르 문명의 영광을 그대로 지니고 있으면서도 서글픈 이유가 뭔지 알아요?”


 그녀는 이따금씩 도통 속을 알 수 없는 질문들을 던지곤 했다. 이 복잡한 곳에서, 이 복잡한 사람들 틈바구니 속에서도 온 정신이 그녀 한 사람에게 집중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정도였다.


 글쎄. 잘 모르겠는데......”


 그건 말이에요. 캄보디아의 그 많은 사원들 중에서도 유독 앙코르와트 사원만이 서쪽을 향해 있기 때문이에요.”


 서쪽으로 지어진 게 왜 서글퍼?그건 그종교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었을까?”


 나는 늘 그녀의 알 수 없는 그런 물음들에 답을 알 수 없어 바보 같은 질문들만 되풀이하곤 했다. 이곳에 머무는 일주일동안 과연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을까?


 어젯밤 숙소로 돌아왔을 때 비로소 가벼워졌던 머릿속이 다시금 복잡해지면서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그래, 어쩌면 그동안 함께 무거웠어야 했음에도 늘 무거운 쪽은 우리가 아니라 그녀 혼자였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분명 그랬다. 그리고 그 이유가 그녀를 찾아 내가 여기까지 온 이유가 아니었던가. 무거운 그녀의 짐을 알면서도 혼자서 지고 가게 내버려둔 책임을 어떤 식으로든 보상해주어야만 하니까. 다만 너무 늦지만 않았으면......


 톤레샵 호수를 보려면 어디로 가면 되지?”


 내 옆에 서서 1달러, 1달러를 외쳐대던 눈이 동그란 캄보디아 소년의 모습이 안쓰러워 그의 손에 1달러를 건네주면서 내가 물었다.


 " 이제 곧 우기가 시작되니, 아마도 호수의 규모가 지금보다 더 커질 거예요. 아마 굉장할 걸요."


 엄지손가락을 치켜든 아이의 얼굴에 자랑스러움이 배어났다.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호수답게 톤레샵 호수의 규모는 굉장했다. 그들의 핏빛 같은, 차마 누렇다고 할 수도 없는 붉은 흙탕물 속에서 아이들은 수영을 하는가하면, 호수 위에 위태로이 세워진 수상가옥에서 호수로 나와 앉은 아낙네들이 그릇이며 옷가지들을 흙탕물 속에 담갔다 뺐다하는 동작을 무심히 지켜보다가 문득 씻어도 완벽히 깨끗해질 수 없는 그들의 삶이 그대로 내게 투영되는 듯 한 서글픔에 휩싸였다. 우기가 끝나갈 음력 10월 보름이면 저들도 고단한 삶을 부려놓고 저들의 혈관 같은 호수 위에서 한바탕 축제를 벌이겠지. 그들의 시바신을 찬양하면서.


 난 차라리 아저씨가 바람둥이였음 좋겠어요.”


 이미 난 어떤 면에서 바람둥이인 걸.”


 아니, 이런 바람 말고. 정말 이 여자 저 여자 오는 여자 안 막고, 가는 여자 안 잡는 그런 플레이보이 말이에요.”


 그녀는 내가 아내를 두고 자신을 사랑하고 있음에도 바람둥이는 아니란 모호한 말을 했었다. 그래서 그게 더 슬프다고.


아이러니하게도 ‘위대한 호수’라는 뜻을 가진 톤레샵 호수의 수상가옥에 사는 사람들의 삶이 그러하듯, 나를 사랑하는 대가로 그녀가 견뎌내야 했던 세월 또한 그렇게 슬프고 피폐했으리라.


 지친 몸을 이끌고 씨엠 립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 메콩강 유역에 자리한 숙소 하나를 겨우 얻을 수 있었다. 호텔이라고 하기가 민망할 정도로 호텔 곳곳은 쾌쾌한 냄새와 벽면은 검은 얼룩들로 가득했다. 피곤이 몸서리칠 정도로 밀려와 곧장 뜨거운 물로 샤워를 끝내고 곧바로 침대 속으로 기어들었다. 침대 옆 탁자위에 놓인 DVD 쪽으로 손을 뻗어 기계 속으로 집어넣자 어두운 화면 사이로 포마드 기름으로 말끔하게 머리를 빗어 넘긴 양조위의 모습이 화면에 나타났다. 묵직한 첼로 선율이 영화 중간 중간 울려 퍼질 때면 이상하게도 묵직한 통증이 가슴에 밀려들었다.


 내가 정말로 아저씨를 사랑하는 순간이 지금껏 살아온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빛나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 때 는 떠날 수 있을 거예요. 다만 아직은 그 때를 모른다는 거예요.”


 무슨 소리야? 떠난다니? 헤어지기라도 하겠다는 소리야?”


 함께하는 것만이 꼭 사랑의 완성은 아니에요.”


“......”


“언젠가 내가 물었었죠? ‘화양연화’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냐고? 그 영화를 보면 차우가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사원의 기둥에 난 구멍 속에 리첸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묻는 장면이 나와요. 결국 사랑이란 건 완성이 아니라 절제란 걸......”


 그녀의 말들은 내게 항상 수수께끼 같은 물음표를 던졌음에도 내가 그녀가 사라지고 나서 무작정 캄보디아행 비행기에 몸을 실을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도 따지고 보면 그런 그녀의 수수께끼 같은 말들 때문이었다. 그럼 그녀가 떠난 이유도 그 때문인가?


 톤레샵의 흙탕물이 가슴 속을 범람하당장이라도 거대한 물살에 익사당할 것만 같은 절박함이 밀려들었다. 그래, 내일 당장 그녀가 말한 그 앙코르와트 사원으로 가야만 한다. 켜놓은 화면 속에는 그녀가 말한 바로 그 장면, 양조위가 앙코르와트 사원 기둥에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고는 그 구멍 난 사이를 꽁꽁 흙으로 봉합하고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무슨 말을 했을까?


 이 사원은 말이에요. 앙코르 왕조의 전성기를 이룬 소야바르만(1112~1152)2세가 바라문교의 주신 비슈누와 합일하기 위해 12세기 전반에 걸쳐서 약 30년간 건축한, 당시로서는 가장 화려하고 빛나던 건축물이었대요. 근데 그때의 영광은 간데없고, 지금은 쓸쓸함만이 남았잖아요. 사랑도 그와 같은 거예요.”


 그녀의 말이 명치끝을 쑤셔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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