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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ris Seok Jan 11. 2022

백신이 가져다 준 휴식시간

백신을 맞고 24시간 쉴 수 있었다

밖에서 에너지를 얻는 나같은 유형(mbti: enfp)의 사람도 일주일에 하루 정도는 집에서 양껏 백수생활을 하고 싶을 때가 있다. '이불 밖은 위험해'를 몸소 실천하고 싶은 날은 침대에 누워 하루 종일 누워 보고싶었던 영상들을 끝없이 즐기고 싶다. 드라마 하나를 콕 찝어 정주행을 하고 싶기도 하고, 재미난 소설책(또는 만화책)을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읽고 싶다. 한국에 살고 있더라면 배달앱을 통해 그때 그때 땡기는 음식도 시켜먹으며 피둥피둥 살찌든 말든 실컷 단짠 음식을 누리고 싶다.


그렇다. 나는 지금 실현 불가능한 희망사항을 구구절절 늘어놓고 있다.


두 아이의 엄마인 내가 '소가 된 게으름뱅이'의 주인공이 될 수는 없다. 평일에는 일과 육아, 주말에는 온전한 육아를 해내야 하는 게 나의 미션이다. 침대에서 하루 종일 늘어져 있기는 엄마가 되기 전에나 가능했던 일이다.


그런데 최근 부스터샷 접종을 하고 실로 오랜만에 20시간 풀타임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백신 덕에 가진 휴식시간이라니 상당히 아이러니하지만, 사실이 그렇다.




부스터샷을 맞기까지는 고민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주변에서 부작용 사례(주사 맞은 팔에 피멍이 들거나 두드러기가 나는 경우 등)가 심심찮게 들려왔고, 굳이 두 번이나 백신 접종을 끝마친 마당에 세번째 백신을 내 몸에 투입하는 일은 자진해서 백신 인체실험의 참여자가 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현재 미국은 오미크론 변이 확산으로 코로나19 초창기처럼 비상사태다. 하루가 다르게 확진자와 병원 입원자 수가 늘고 있다. 거기다 오미크론은 이전의 코로나 바이러스와는 다르다. 백신이 그닥 효과적이지 않다는 말도 있고, 돌파감염자도 많다.


부스터샷이 오미크론에 그나마 효과가 있다고 하니, 직업상 사람들을 꾸준히 만나는 나로서는 부스터샷을 맞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모더나 부스터샷은 지난 1차, 2차 접종의 절반 용량이어서 맞고 보니 2차 때만큼 아프지는 않았다. 하지만 약간의 두통과 근육통은 있었다. 게다가 '난 부스터샷을 맞았으니, 컨디션이 좋지 않을거야'라는 믿음 때문인지 자꾸만 누워있고 싶어졌다. 남편은 그날 혹시나 부스터샷을 맞고 아플 지도 모를 나를 위해 일찍 퇴근을 했다.


대체적으로 남편은 야근을 하는 경우 잦아, 평소의 나였더라면 오후 6시 재택근무를 끝내고 아이들의 저녁을 먹이고, 목욕을 시키고, 재우는 일까지 도맡아야했다. 하지만 부스터샷을 맞은 날 만큼은 남편이 일찍 퇴근한 덕택에 퇴근 이후의 육아로부터 도피할 수 있었다.


나는 실로 오랜만에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퇴근 후 곧바로 침대로 직행할 수 있었다. 몸살 기운이 살짝 있는 것 같기도 했지만 타이레놀을 먹으니 미세했던 두통도 사라지고, 컨디션이 썩 나쁜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부스터샷을 맞아 강제(?)로라도 쉬어야 하는 상황에 처했으므로, 기꺼이 쉬기로 했다.


남편은 아이들을 재우기 위해 차를 타고 드라이브 나갔고, 난 고요함 속에 파묻힐 수 있었다. 아이들이 없는 집은 조용했다. 난 곧장 티비를 켰다. 넷플릭스에서 '솔로지옥'을 정주행했다. 아름다운 젊은이들의 연애사를 보고있노라니, 흐믓한 미소가 지어졌다. 20대의 사랑 이야기를 지켜보다 보면, 내가 얼마나 청춘으로부터 멀어졌는지를 새삼 자각하게 된다. 달달하고, 풋풋한 사랑이야기는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니다. 뭐, 지금처럼 안정감있고 신뢰감 가득한 남편과의 사랑이야기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얼마만에 조용한 집에서 홀로 남아 넷플릭스를 즐기는 것인지... 이런 것이야 말로 진정한 '소확행'일테다.


부스터샷을 맞은 덕에 간만에 즐긴 휴식시간이 달콤하기만 했다. 물론 다음날은 근육통과 두통을 이겨내며 재택근무를 하느라 쓴맛을 봤지만.


이틀 뒤 남편도 부스터샷을 맞았다. 이번엔 상황이 반대가 됐다. 나는 토요일 하루 종일 아이들을 돌봤고, 남편은 겨울잠을 자는 곰처럼 24시간 내내 약에 취해 잠만 잤다. 부스터샷을 맞고서야 밀린 잠을 실컷 잘 수 있는 남편이 짠하기도 했다.


"오빠, 부스터샷 덕에 실컷 잤네."

"이제 조금 개운한 느낌이 드네."


남편과 , 바쁜 현대인의 표본인 우리는 부스터샷 덕에 오랜만에 자 휴식시간을 가졌다. 웃픈 이야기를 자랑처럼 늘어놓자니 슬픔은 사라지고 웃긴 부분만 남은  같기도 하다. 젊은 나이에 아이를 낳아 키우고 바쁘게 일하는 만큼 40대의 나와 남편에게 부스터샷 없이도 충분한 휴식시간이 있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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