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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ris Seok Feb 13. 2022

발렌타인 구디백(Goody bag)

발렌타인을 10일 앞두고 첫째 아이가 다니는 학교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이메일이 왔다.

학생 25명을 위한 발렌타인 카드 또는 구디백을 발렌타인데이 당일에 준비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구디백(goody bag)이란 아이들에게 주는 선물이나 간식 주머니로 우리나라 식으로 말하자면 일종의 답례품으로 보면 된다. 네이버 사전에는 '파티가 끝난 뒤 아이들에게 집에 가져가도록 주는 과자와 선물이 든 봉지'로 정의돼 있다. 미국에서 학부모로 살다보면 구디백을 준비할 일이 꽤나 있다. 대표적으로 아이들 생일과 할로윈에 구디백을 준비하곤 한다.


학부모가 처음이다 보니, 발렌타인 데이에도 구디백을 챙겨야 한다는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남편과 연애 때 발렌타인 데이에 서로 뭘 주고 받을까만 생각해봤지, 아이들에게도 발렌타인 데이가 의미있는 날이 될 줄이야.


생각해보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미국은 발렌타인 데이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한다. 발렌타인 시즌에 수퍼마켓에 가면 미국인들이 발렌타인 데이를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다. 마켓의 한 섹션이 발렌타인 데이를 위한 물품들로 가득 꾸며져 있으니까.


발렌타인 구디백 25명분을 준비하라는 이메일에 엄마의 마음은 조급해진다. 미리미리 준비해놓지 않으면, 원하는 물건을 구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심지어 메일에는 '푸드 금지'가 명시돼 있었다. 발렌타인이지만 초콜렛, 캔디류는 선물할 수 없는 것이다. 부랴부랴 아마존에 들어가 발렌타인 구디백을 검색해보니, 아기자기한 놀이감들이 나왔다.


아들 반 친구들이 구디백을 받자마자 기분이 아주 좋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무얼 넣어주면 좋을지 매의 눈으로 살펴봤다. 만약 우리 아들이라면 무엇을 받았을 때 가장 흥분할까? 우리 아들은 버튼을 눌러 반짝이면 기분이 좋던데 그렇다면 불빛이 나오는 팔찌?


아들 기준으로 대입해 생각해보고, 구디백에 넣을 장남감 세 종류를 구입했다. 어떤 건 14개씩 한 세트여서 28개를 사야했고, 어떤건 30개를 사야했다. 25명 것을 포장하고 나면 어쩔 수 없이 나머지 놀이감이 잔반찬처럼 남게 될테지만 어쩔 수 없다.


주문한 발렌타인 구디백 준비물들이 2~3일 내로 도착했다.

아이들을 재우고 육퇴의 시간으로 진입. 나는 구디백 준비물들을 식탁 위에 주르륵 펼쳐놓고 포장을 시작했다. 발렌타인용 포장 세트도 샀기 때문에 포장이 별것 아닌 것처럼 보였지만 막상 시작해보니 손이 꽤나 가는 일이었다. 아들 친구들의 구디백을 위해 가내 수공업을 하는 내 자신이 문득 뿌듯하게 느껴졌다. 아들을 위해 무언가 해준다는 감각이 그저 좋아서였다. 워킹맘은 늘 어느 정도는 죄책감과 두려움을 가지고 사는 법이다. 혹시 내가 일하느라 아들에게 결핍을 주면 어쩌지, 하는 불안은 언제나 존재한다. 게다가 요즘들어 아들은 "왜 누구누구 엄마는 일을 하지 않고 매일 학교에 픽업하러 오는데, 엄마는 일을 가야할 때가 있냐"며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물을 때가 더러 있었다.


내가 회사에 가는 날이면 도우미 이모님이 아들을 픽업하러 가는데, 아들은 그게 영 못마땅한 모양이다. 엄마가 학교에 데리러 오는 게 훨씬 더 기쁠 아들의 마음이 백번 이해는 갔다. 하지만 일을 해야만 하는 엄마인 것을 어찌 설명하면 좋을까.


"엄마는 일이 너무 좋아. 이해할 수 있을까?"

"엄마는 내가 좋아, 일이 좋아?  

"당연히 우리 아들이 훨씬 더 좋지만, 그래도 일을 하면서 느끼는 행복도 있어."


당연히 아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그저 막연히 일이 엄마에게 큰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인지할 뿐이리라. 그래도 요즘에는 근무 5일 중 4일은 재택근무를 하고 있기 때문에 매일 출퇴근을 하던 과거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가끔 재택근무를 하는 날에도 급박하게 취재를 가야할 때가 있는데, 그때 아들에게 가장 미안하다. 갑작스러운 취재는 아들에게 미리 이야기 해줄 수가 없는 부분이고, 엄마가 학교에 자신을 데리러 올 줄 알았던 아들은 학교에 자신을 데리러 온 이모 할머니를 보자마자 눈물을 터트리곤 한다. 아이가 집에 오는 내내 울었다는 소식을 이모님께 받은 날이면 마음이 무거워진다. 이렇게까지 일을 해야 하나, 하고.


그래도 일을 그만둘 마음은 0%에 수렴한다. 나는 '일을 하지 않는 나'라는 옵션에 대해선 살면서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일을 하는 나 자신을 사랑하거니와 일을 통해 사회와 연결돼 있다는 느낌을 얻는다. 일에서 생의 의미를 찾는 나같은 유형의 인간은 일을 그만둘 수가 없다. 물론 회사는 그만두고 프리랜서로 삶을 꾸릴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을 수는 없겠지만서도. '백년을 살아보니'의 저자 김형석 교수님처럼 나이가 들어도 건강이 허락하는 한 일을 하며 살아가고 싶은 게 가장 큰 꿈이다. 그러니 아들에겐 미안하지만 전업맘이 되어줄 수는 없다.


그래도 오늘처럼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 날에는 최대한 엄마의 사랑과 정성을 느끼게 해주겠다고 다짐한다.구디백, 생일파티, 플레이데이트 등 학교생활 이외에도 아이를 위해 해줄 일은 버겁게도 많지만, 아직까진 할 만 하다.


아들의 발렌타인 후기가 기대된다. 

친구들과 구디백을 나눠 가지며, 사랑을 주고 받는 마음을 알게되는 하루가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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