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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ris Seok Apr 09. 2022

'브리저튼' 세상에 다녀오다

https://www.youtube.com/watch?v=YEwfAc30g4U&t=38s

한 소녀가 있었다. 소녀는 세상의 모든 사랑 이야기에 열광했다. 중학생 때 '그놈은 멋있었다', '늑대의 유혹', '짱들의 연애방식' 등의 인터넷 소설로 사랑 이야기를 접한 소녀는 스스로에게 '양귀비'라는 닉네임을 붙였다. 그 시절 소녀가 썼던 소설은 '싸가지와 계약결혼', '섹시하게 혹은 악마같이' 등의 제목을 가지고 있었는데, 열다섯살이 쓴 로맨스 소설의 내용은 황당무개 그 자체였다.


하지만 소녀는 사랑 이야기가 좋았다. 소녀는 시험기간이 끝나면 스스로에게 주는 보상처럼 일주일씩은 매일 밤마다 할리웃 로맨스 영화를 감상하곤 했다. 소녀는 자신만의 러브스토리를 머릿속으로 만들어내곤 했는데, 상상 속에서는 무도회씬이 꼭 포함됐다. 로미오와 줄리엣, 타이타닉과 같은 영화에 감명받았기 때문이리라.


30대가 된 그 시절 소녀는 두 아이를 키우며 워킹맘으로 살아가는 현재의 삶에서도 여전히 사랑 이야기에 목말라 있다. 사랑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가치라고 굳게 믿으며. 육아를 끝내고 매일 밤마다 로맨스 드라마를 보는 30대 여성, 그건 나다.

 

그런 내가 지난해 넷플릭스에서 감명깊게 시청한 로맨스물을 꼽으라면 일말의 고민없이 '브리저튼'을 이야기한다.


브리저튼은 19세기 영국문화, 남녀 주인공의 계약 연애 서사, 주인공들의 아름다운 패션 등 매혹적인 요소가 군데군데 균형맞게 섞여 있는 드라마였다. 전 세계 시청자들은 브리저튼에 매혹됐고, 넷플릭스에서 소위 대박을 터트렸다. (브리저튼은 2020년12월25일 최초 공개됐고, 2021년 TV 드라마 부분 전 세계 누적 시청률 2위를 기록했다.)



지난 3월25일 넷플릭스가 '브리저튼 시즌 2'를 공개한 가운데 때마침 LA에서는 브리저튼 무도회가 열렸다.


무도회의 공식 명칭은 'The Queen's Ball: A Bridgerton Experience'로 직역하면 '여왕의 무도회: 브리저튼 체험'이다.


브리저튼 시즌 1을 워낙 감명깊게 시청한 나는 인터넷 광고로 브리저튼 무도회를 보자 마자 홀린듯 티켓을 2장 구매했다. 반 년 전쯤에 구매한 티켓인데, 정신없이 살다보니 어느덧 무도회가 열리는 4월1일이 다가왔다. 무도회가 열리기 며칠 전 쯤 남편에게 "이번주 금요일 밤에 브리저튼 무도회 가야하니까 야근하면 안된다"고 당부했는데, 남편은 어리둥절했다. 브리저튼이라는 드라마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 조차도 모르는 사람이니, '브리저튼'은 무엇이며 '무도회'는 또 무엇인가. 남편이 기겁할만 했다.  


사실 막상 티켓은 구입해놨지만서도, 나 또한 우려가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왠지 허접할 것만 같은 느낌적인 느낌? 50달러의 티켓은 과연 어떤 경험을 선사해줄 것인가. 명성이 자자한 드라마 '브리저튼'의 발끝의 때만큼이라도 따라잡을 수 있을까? 무도회에 알맞은 옷을 고르면서도, 과연 이렇게까지 드레스업하고 참석할만한 가치가 있는 파티일지에 대해 걱정이 따라왔다.

남편과 함께 무도회가 열리는 LA 다운타운의 '밀레니엄 볼티모어' 호텔에 도착했다. 호텔을 들어가자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여성들이 여기 저기서 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남편의 옆구리를  찔렀다. "것봐. 저렇게 화려하게 입고 와야 한다니까."  남편의 만류 덕에 원래 입고 나오려던 꽃이 잔뜩 박힌 드레스를 포기하고, 무난한 블랙 드레스를 입은 터였다. 남편은 대체 그런 차림으로 어딜 나가는 거냐고, 그건 아니라고 했다. 나도 왠지 과한가 싶어 블랙드레스로 노선을 갈아탔지만, 다른 참석자들을 보니 원래 찜해둔 드레스를 입고 왔어도 나는 전혀 튀는 차림이 아니었을거다.

미국 사람들은 진정으로 파티에 진심이었다. 참석자들 모두 '브리저튼' 드라마의 시대적 배경인 영국 19세기에서 막 튀어나온 사람 같이 보였다. 덕분에 사람들의 옷 차림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다들 저런 드레스는 어디에서 구한 것일까. 할로윈 의상이 워낙 발달한 나라인만큼 인터넷을 통해 얼마든지 구할 수 있기는 했겠지만. (브리저튼이 드라마 이름인지도 모르는 남편말고 브리저튼을 재미나게 시청한 친구와 제대로 변장하고 참석했으면 더 재밌었겠다, 는 생각이 들었다는 건 비밀...)




무도회가 열린 호텔은 애초에 고풍스러운 분위기로 유명한 곳이다. 과거 행사 취재를 위해 방문했을 때, 엘에이에도 이런 호텔이 있었던가 놀랐다. 현대식 호텔이 가져다 줄 수 없는 전통이 있는 호텔만의 매력은 분명히 존재한다. 브리저튼 무도회 이벤트는 엘에이 뿐만 아니라 영국, 뉴욕 등 전 세계 곳곳에서 개최되고 있는데, 이 호텔이야 말로 브리저튼 드라마의 무도회 장면을 구현하기에 가장 적합한 곳이지 않았으려나 싶다.

자칫하면 허접할 수도 있었던 '브리저튼 무도회'는 기대 이상이었다. 브리저튼 드라마를 제대로 구현하기 위해 가짜 여왕이 무도회 현장에 등장해 참석자들의 인사를 받는가 하면, 라이브 음악과 함께 다함께 춤을 추는 공간도 있었다. 이를테면 브리저튼 컨셉의 클럽 파티가 펼쳐진 것. 이날 참석자들은 캘리포니아주와 LA시의 새로운 법에 따라 실내에서 마스크를 쓰지 않고 있었다(백신 접종 증명서는 입장 전 제시해야 했음). 때문에 마치 코로나 바이러스가 사라진 세상에서 파티에 온 것만 같았다. 물론 코로나19에 감염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도 엄습했지만.



드라마를 재밌게 시청한 사람이라면 이 무도회는 한 번쯤은 꼭 가볼만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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