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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ris Seok Nov 09. 2022

흐린 날씨의 매력

겨울냄새


사시사철 따뜻한 이곳 LA에도 서늘한 날씨가 찾아왔다. 온도를 확인하기 위해 창문을 열고 아침 공기를 마셨더니, 코 안으로 훅 찬 기운이 들어왔다. 이건 겨울 냄새다. 명확하게 겨울 냄새가 났다. 아주 오랜만에 맡아본 냄새. 이윽고 난 내가 이 냄새를 몹시도 그리워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본래 난 여름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어떤 계절이 좋아, 라는 질문에 언제나 여름이라고 대답했다. 쨍한 햇볕과 그에 따른 밝은 색감, 거리의 생동감, 더위를 달래기 위해 마시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얇고 짧은 옷들, 여름휴가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들뜬 목소리. 여름에 관한 모든 것을 난 애정한다.


그런데 올해는 그렇지 못했다. 지구온난화의 영향으로 LA의 기온은 ‘100년 만의 무더위’를 기록했고, 무지막지한 더위는 내가 사랑한 과거의 여름과는 달랐다. 따스함이라기 보다는 사막날씨였고, 사막 위에서의 삶은 까슬한 모래만큼이나 퍽퍽했다.


게다가 LA에 살게된 후부터 피부가 엉망이 됐다. 거울을 보면 주근깨와 기미로 뒤덮인 볼이 가장 먼저 보였다. 더이상 피부를 망치고 싶지 않아서 난 얼굴의 3분의 2를 가리는 기이한 마스크를 쓰고 동네를 돌아다녔다. 운전할 때도 얼굴 가리개는 필수였다. 어느새 난 여름을 즐기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비의 '태양을 피하는 방법' 노래는 나의 주제가가 되었다.


'환하게 비추는 태양이 싫어 태양이 싫어'

'태양을 피하고 싶어서 아무리 달려봐도 태양은 계속 내 위에 있고'


태양을 요리저리 피해다니는 나를 보며 남편은 "드라큘라세요?"라며 놀렸다. 나도 태양을 피하는 내 모습이 꼴사납고 우스웠다. 하지만 내 피부가 더 중요한 것을 어쩌랴. 이제 난 푹푹 찌는 더위도 싫고, 피부를 망치는 자외선도 싫은 30대 중년 여성이 되어버렸다. 한 여름 태양을 대하는 태도의 변화로 나이 들어간다는 사실을 실감할 줄이야.


몇개월째 지속되는 LA의 무더위에 질릴대로 질린 상황에서 뒤늦게 찾아온 추운 날씨는 아주 반가웠다. 11월이 되어서야 LA는 추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곳은 가을도 없이 여름에서 바로 겨울로 점프해버린다.


요며칠 비가 내렸다. 비와 함께 안개도 동네에 깔렸다. 아이들을 등교시키는데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우린 저마다 농에 박혀 있던 패딩을 꺼내 입고, 레인부츠를 신었다. 지난 몇개월 동안을 반팔, 반바지만 주구장창 입다가 겨울옷과 신발을 신으니 설레는 기분이 들었다.


아, 나는 비가 내리는 날씨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버렸구나. 사람은 이렇게 변하는구나. 평생 여름만을 사랑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인스타그램에도 LA에 사는 지인들은 비가 내린다며 좋은 기분을 드러냈다. 이 비가 반가운 건 나만이 아니었다. 사람은 아무래도 희소한 것에 끌리기 마련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LA에서의 비는 매우 드물게 내리므로, LA 주민들에게 비는 가뭄의 단비같은, 그런 귀한 존재일런지도.


비가 올 때는 집에서 머무는 시간이 가장 좋다. 뜨끈한 아메리카노를 한 잔 마시며, 재즈를 틀어놓고, 책을 읽는 여유. 비 오는 날이 조금은 더 지속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런데 글을 쓰는 지금 창밖으로 또다시 태양이 떠오른다. 아무래도 이곳에서 태양을 피하려는 나의 몸부림은 부질없는 행동 같다. 태양이 싫다, 아무리 노래해 봐도 태양은 계속 내 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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