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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ris Seok Jan 25. 2024

이직 후 엄마와 아이는 함께 울었다

마침내 6년간 정들었던 회사와 작별을 고하고 이직에 성공했다. 주체적으로 선택한 이직이지만 마냥 기쁘지는 않았다. 가장 마음에 걸린 건 당연히 아들이었다. 아들은 엄마의 이직으로 인해 조금 더 오랜 시간 학교에 머물러야 했다. 지난 직장에서는 재택근무를 했기 때문에 학교가 끝나자 마자 바로 아들을 픽업할 수 있었지만, 다시 출퇴근 하는 직장으로 옮긴 후에는 그게 불가능했다. 아들은 ‘애프터스쿨’(After school), 즉 방과후 프로그램에 가야만 했다. 


이직 첫날. 


새로운 직장 사무실에 출근하는 마음이 사뭇 비장했다. 특히 함께 일하는 동료들이 모두 미국인이라는 사실도 긴장감을 더했다. 기자로 일하며 미국 정치인들을 인터뷰해왔지만, 인터뷰를 하며 잠시 소통하는 것과 하루 종일 외국인과 소통하며 지내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회사에 도착해 내 책상을 부여 받고, 회사 이메일 등을 설정하며 반나절을 보냈다. 동료들은 약 20여명. 미국인들은 ‘스몰 토크’를 정말 좋아한다. ‘스몰 토크’를 한국식으로 이해해보자면 잡담이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서로 친밀해지는 것이다. 한국에 오랜 기간 살다가 미국에 온 한국인들 중에서는 이 스몰 토크의 어려움에 대해 토로하는 이가 많다. 왜냐? 궁금하지도 않은 주제로 시도때도 없이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는 게 영 어색하기 때문이다. 나 또한 다르지 않았다. 20여명의 이름을 구분하기도 어려운데(미국이름은 한국이름 보다 잘 외워지지가 않는다), 그들 한 명 한 명과 스몰토크를 나누는 일은 실로 어색했다. 



게다가 어떤 업무를 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는 채로 첫 미팅에 투입됐다. 구글 화상채팅으로 만난 상대방에게 짤막한 내 소개를 하고서 나는 일단 미팅 내용을 들으며, 필기했다. 미팅이 끝난 후 선배에게 이게 무슨 주제로 대화를 나누는 건지 간략한 설명을 들었다. 이후 선배는 업무 지시를 줬는데, 역시나 이곳은 학교가 아니므로 자세한 지시사항은 주어지지 않았다. 그저 내가 할 일은 내가 알아서 배워야만 했다. 


이직 첫날은 정신없이 흘러갔다. 흡사 전쟁을 치룬 것만 같았다. 몸과 마음이 탈탈 털린 채로 첫째 아들을 픽업하기 위해 정신없이 차를 몰았다. 다행히 사무실과 학교의 거리는 차로 15분. 아들은 픽업 온 나를 보자 교실에서 나와 울음을 터트렸다. 아이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엄마, 나 애프터스쿨 하기 싫어. 으아앙.”


우는 아이의 얼굴을 보자 나도 덩달아 따라 울고 싶어 졌다. 우리는 함께 차에 탔고, 내 눈에도 어느새 눈물이 고였다. 


“엄마도 오늘 너무 힘든 하루를 보냈어. 모두 처음 본 사람들이었고, 아무도 엄마에게 친절히 엄마가 해야 할 일에 대해 설명해주지 않았어. 엄마가 혼자 할 일을 익히느라 너무 힘들었어.”


나도 아들에게 투정을 했다. 오늘 하루가 얼마나 고됐는지에 대해. 아들은 엄마의 힘든 하루에 대해 집중해서 들었다. 곰곰이 생각하더니, “내가 나이가 어리니까 엄마랑 나랑 힘든 거 서로 동점이네”라고 했다. 


그래 맞다. 동점이다. 


아들과 함께 눈물을 쏟아내며, 힘들었던 하루 끝에 왠지 모를 위로를 받았다. 아들과 연대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함께 이 힘든 시기를 견디고 있고, 함께이기 때문에 괜찮다는 생각. 아들에게 내일은 분명 오늘보다는 더 나은 하루가 올 거라는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하며 내 마음도 좀 더 굳건해졌다.


(사진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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