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줌마가 된 후 20년 만에 순정만화를 읽어보니

어린시절의 나를 만나다

by Iris Seok

십대 시절 엄마와 난 매일 저녁 아파트 상가에 있는 비디오방(=책방)으로 산책을 나가곤 했다. 워낙 소설책과 영화를 좋아하던 엄마, 그리고 순정 만화책 덕후이던 나는 비디오방에 들어가면 어딘가에 홀린 사람 마냥 한 시간 가까이 시간을 보냈다. 10평 남짓한 비디오방에 들어가면 먼저 풍겨 나오던 그 냄새를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오래된 책들이 묵은지 마냥 묵어 꿉꿉한 냄새를 풍겼는데, 그 냄새는 ‘아 이곳이 비디오방이구나’를 후각으로 실감케 했다.



비디오방은 1만원, 2만원 등 선불을 지불하면 대여료에 회원제 가격을 적용했다. 만화책 3권에 천원, 소설책은 2권에 천원, 비디오는 1개당 천원. 새로 출시된 비디오일 경우 개당 천 오백원. 엄마는 늘 1~3만원 정도의 선불을 비디오방에 지불했는데, 엄마와 내가 워낙 자주 가다 보니 선불 금액은 금방 동이 났다. 방과 후 혼자 비디오방에 들렸다 선불 금액이 남아있지 않다는 걸 알고선 엄마에게 용돈으로 받아 주머니에 넣어둔 꾸깃꾸깃한 천 원짜리 지폐들, 동전들을 한 데 모아 주인 아저씨에게 건넸다.



2천원치에 해당하는 만화책 6권을 빌려 검은 비닐봉지에 담아 엄마 손을 잡고 집으로 가던 길, 난 세상을 다 가진 사람처럼 행복했다. 얼른 집에 도착해 오늘 빌린 책들을 읽을 생각에 설레던 마음. 만화책을 읽으며 미래에 내게도 다가올지 모를 운명적인 사랑을 꿈꾸는 어린 소녀가 손에 잡힐 듯이 아직도 눈 앞에 아른거린다. 아아 그 때의 나는 얼마나 순수했던가.





그렇게 만화책과 함께 성장한 소녀는 20년 후 신문기자가 되어 미국 LA에 살고있다. 이제는 만화책이 아닌 소설책, 에세이 등에 열광하는 활자 덕후로 일상의 즐거움을 찾는다.



미국에 살며 한국 책을 구입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지만, 내가 살고있는 LA에서는 사정이 조금 다르다. LA 한인타운에는 반디, 알라딘 서점 등을 비롯한 대형 브랜드 서점 뿐 아니라 소형 서점도 곳곳에 산재해 있는 편이라 나 같은 한국 책 매니아에게는 참으로 희소식이다. 최근에도 장을 보기 위해 한인타운에 나갔다가 알라딘 서점이 운영 중이길래 반가운 마음에 발걸음을 옮겼다. 코로나19 상황 속에서 대부분의 비즈니스가 문을 닫아 몇 달간 서점에 가지 못했던 터라 좀이 쑤시던 차였다.



신간 코너를 쭉 둘러 보며 구입할 책 몇 권을 한아름 손에 안고, 마지막으로 만화책 코너를 돌았다. 그날 중고 만화책 코너로 향했던 건 단순히 어떤 책들이 들어와 있나 궁금증 때문이었다. 최근 웹툰을 제외한 만화책을 읽은 적은 없으므로, 딱히 만화책을 구입할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그 때였다. 내 눈에 들어온 핑크-흰색 줄무늬 만화책 띠지. 핑크와 흰색으로 이뤄진 줄무늬 띠지는 추억의 <꽃보다 남자> 책이 아닌가! 어린 시절의 나를 홀리게 했던 그 책. 대만 드라마, 일본 드라마, 한국 드라마까지 줄줄이 섭렵하게 했던 전설의 <꽃보다 남자>. 띠지를 발견하자 마자 초등학생 시절의 순수한 내가 떠올라 코끝이 찡했다.


중고책 <꽃보다 남자> 8권을 사서 집에 오자 마자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20년 전에 읽은 책인데도 어렴풋이 내용이 기억이 났다. 그리고 더 신기한 건 여전히 재미있었다. 8권을 다 읽고 9권이 읽고 싶어졌다. 아니, 아예 통째로 <꽃보다 남자> 전권을 다시 읽고 싶었다. 결국 나는 그날 밤 반디 USA 미국 웹사이트에 들어가 <꽃보다 남자> 전권을 구입 하고야 말았다. 배송비까지 포함해 총 185달러. 비싼 가격이었지만…그럼에도 이미 손 끝은 카드번호를 입력하고 있었다.





일주일쯤 지났을까. <꽃보다 남자> 전권이 집으로 배송됐다. 포장 박스를 뜯어 꽃보다 남자 책들을 보자 마음이 붕 떠올랐다. 어찌나 반갑던지. 이미 개정판이 새로 나와서 분홍-흰색 줄무늬 띠지로 된 원조 책을 구입할 수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꽃보다 남자> 표지에 그려진 주인공들의 얼굴을 보자 마자 어린 시절을 향한 향수가 뭉개 구름 마냥 내 주변을 둘러쌌다.



한달음에 만화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미 다 아는 내용일 뿐더러 30대의 나에겐 유치한 이야기였다. 아이 둘을 낳아 기르며 세상의 풍파를 어느 정도 알아버린 내가 20년 전처럼 남녀 주인공의 사랑 이야기에 순수하게 열광할 수는 없었다. ‘아, 이건 말도 안돼…’라며 고등학생 주인공들이 클럽에 가고 술을 마시며 문란한 밤 문화를 즐기는 데에 대해 물음표를 무한대 늘어놓았다. 나이가 들면 상상력이 죽는 다더니, 난 만화책을 읽으면서도 현실과 허구를 비교하며 팩트 체크를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꽃보다 남자> 책 전권(20권)을 이틀 만에 완독했다. 그것도 아주 흥미진진하게.



<꽃보다 남자>를 읽는 동안 난 수없이 소녀 시절의 나를 만났다. 엄마와 함께 비디오방을 향하던 나, 방과 후 침대에 누워 만화책을 읽던 나, 주말 아침 디즈니 만화를 보기 위해 오전 8시에 눈을 뜨던 나. 그 시절의 여러 모습들이 여전히 나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다 잊은 줄로만 알았던 어린 내가 30대에도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던 것이다.



그리고 신기했던 점은 만화책의 주인공이던 ‘츠카사’와 내 남편의 모습이 어느 정도 흡사했다는 사실인데, 물론 내 눈의 콩깍지일 수도 있다. 그런데 F4의 나머지 멤버인 루이, 소지로, 아키라의 캐릭터로부터 내 남편을 대입해볼 수는 없지만, 츠카사와는 어딘가 닮아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12살에 읽은 만화책이 내 이상형에 영향을 끼쳤나. 말도 안되는 이야기이지만, 아주 소량의 지분은 차지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놀면 뭐하니>의 싹쓰리의 음악을 들으며 향수에 젖듯이 20년 만에 읽은 <꽃보다 남자>는 이틀 동안 나를 어린 시절로 돌아가게끔 했다. 소장하길 잘했다. 1, 2년에 한번씩 아니 수시로 꺼내 읽으며 과거의 나와 그 시절의 추억들을 마주해야겠다.

이전 10화2평 테라스의 행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