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 룸콕 만으로도 행복해
코로나19 사태 속에 집콕 생활을 해온 지 어느덧 반년 째. 뉴노멀 라이프에 적응해 나름대로 즐거운 나날들을 채워가고 있지만, 지난 8월 여름휴가철이 다가오자 마음에 살짝 울렁임이 있었다. ‘여행’에 대한 갈망을 억지로 꾸겨 넣고 살아오다 SNS를 통해 한국 국내여행을 하는 친구들의 사진을 보자 여행 욕구가 마구 솟아났다. 아…여행가고 싶다!
그러나 언감생심 코로나19 전 세계 1위 국가이니 미국에서 여행이 웬 말인가. 여행을 기대할 수도 또 기대해서도 안되는 시기이니만큼 그 소망은 고이 접어 두었다.
그러던 어느 날, 출근한 남편에게서 카톡이 왔다.
‘자기야. 결혼기념일날 다운타운 호텔이라도 갈까. 그냥 지나치긴 아쉬우니까.’
호텔 투숙이라. 남편의 제안에 처음엔 거부감이 들었다. 이 시기에 호텔에 방문하는 일은 코로나 바이러스로부터 위험성을 높일 수 있고, 제대로 즐길 수도 없는데 가봤자 돈 낭비가 아닌가 하는 마음 때문에.
하지만 남편의 대답은 논리적이었다.
1) 이 시기에 호텔은 그 어느 때보다도 청결에 신경 쓰고 있으며, 손님들도 별로 없다. 그러니 평소 수퍼마켓에 장보러 가는 일 정도의 위험도이다.
2) 평소 쌓아둔 신용카드 포인트로 호텔 예약이 가능하다. 고로 돈 낭비는 아니다.
3) 코로나19 종식 시기가 내년 연말로 예측되는 가운데 내년까지 여행은 불가능하니 호캉스라도 즐겨야 한다.
남편의 대답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고, 무엇보다도 나는 설득 당하고 싶었다. 잔잔한 일상 속에 특별한 1박2일을 호텔에서 보내고 나면 쌓여있던 스트레스가 풀릴 터였다. 거기다 결혼기념일 5주년이 아닌가. 호캉스라도 즐기며 여름 휴가 겸 결혼기념일을 의미 있게 보내기 위해 결국 남편에게 ‘오케이’라는 대답을 날렸다.
호캉스 당일. 호텔에 가기 전 한인타운을 들렸다. 먼저 한인 마켓에서 과자, 술, 컵라면 등을 샀다. 그리고 BBQ에 들려 프라이드 치킨을 순살, 뼈 반반씩 해서 한 마리를 주문했다. 나와 아들은 순살을 좋아하는 반면 남편은 뼈 치킨을 선호해 늘 이렇게 주문하곤 한다.
솔솔 코 안으로 파고드는 치킨 냄새를 맡으며 호텔로 향하는 길. 조금은 여행가는 기분이 났다. 사실 자동차로 호텔과 우리 집 사이의 거리는 불과 15분 안팎. 집을 근처에 두고 호텔에서 1박을 하다니 뭔가 아이러니하기 짝이 없지만 그럼에도 ‘여행가는 기분’을 오랜만에 느낄 수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진그룹이 LA에 1조6,000억원을 들여 건설해 화제가 된 LA 다운타운의 ‘인터컨티넨탈 호텔’에 도착했다. 이 빌딩은 73층 높이로 LA는 물론 미 서부 지역에서 가장 높은 마천루다. 건물의 저층부인 1~10층에는 상업시설과 컨벤션센터, 11~30층에는 사무공간이 마련돼 있다. 인터컨티넨탈 호텔 객실은 31~72층에 위치해 있다.
체크인을 하기 위해 70층 로비로 올라갔다. 로비에 손님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체크인은 금세 이뤄졌다. 프론트 호텔 직원들은 한 팀의 체크인을 마치면 다음 팀을 받기 전에 데스크 표면에 소독제를 뿌려 청결에 신경 쓰는 모습을 보였다. 덕분에 코로나19 시기에 과연 호텔이 안전할까, 하는 걱정이 어느 정도 수그러들었다.
호텔 방 안에 들어가자 와- 탄성이 나왔다. 처음 와본 곳은 아니었지만 아들과 함께는 처음이었고, 신용카드 포인트가 잔뜩 쌓였던 모양인지 남편이 스위트룸을 예약해 뒀던 것이다. 예상하지 못했던 룸 컨디션에 감출 수 없이 싱글벙글 웃음이 터져 나왔다. 글렌데일의 최수종이라 불리는 남편은 결혼기념일, 생일 때처럼 특별한 날이면 생각지도 못하게 이런 기쁨을 주곤 한다.
아들도 신이 나서 침대 위를 방방 뛰었다. 우리가 묵은 호텔 방의 높이는 58층. 창 밖으로 LA 다운타운이 내려다 보였다. 아들은 “엄마, 자동차가 장난감 만큼이나 작네!”라며 즐거워했다. 고소공포증도 없는지 창가에 바짝 붙어 아래를 내려다 보는 아들을 바라보며,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굳이 차, 비행기를 타고 멀리 가지 않아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에서도 충분히 여행 기분을 만끽하며 이틀을 보낼 수 있는 것이다.
포장해온 치킨을 맛있게 먹고, 아들과 함께 무비타임을 가졌다. 최근 아들이 꽂힌 영화는 ‘앤트맨.’ 언제 이만큼 커서 마블 히어로 영화물에 열광하는 형아가 되어버렸는지. 아들과 남편이 영화를 보는 동안 난 욕조에 물을 받고 목욕을 하며 가져온 소설책을 읽었다.
호캉스에서 가장 좋아하는 힐링 파트는 바로 여기다. 목욕을 하며 책을 읽는 시간.
이사갈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 중 하나는 화장실에 욕조가 있는가이다. 유학생 때 기숙사에 살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 중 하나는 목욕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적어도 매주 2~3번은 목욕을 하는 나는 물 속에서 보내는 시간을 사랑해 마지 않는다. 따뜻한 물 안에 폭 들어가 재미난 책을 읽는 것 만큼 내 심신에 안정을 주는 치유법은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어렸을 적부터 목욕이 참 좋았다. 십대시절 시험기간이면 새벽까지 공부를 하다 공부가 하기 싫어질 때면 '아침에 씻는 수고를 미리 덜어야겠다'고 스스로 합리화 하면서 욕조에 물을 받곤 했다. 욕조에 들어가 나긋한 기분을 느끼다 이윽고 물에서 잠들어 오전 6시경 엄마의 노크 소리에 화들짝 잠에서 깼었다. 그러다 어쩔 땐 감기에 걸리기도 했고. 화장실 수납장에는 목욕하며 읽을 책들이 빼곡하게 쌓여 있었다.
그런데 집에서 하는 목욕도 좋지만 호텔에서 하는 목욕은 더더욱 좋다. 무엇보다도 욕조의 청결함의 정도가 집과는 비교가 안된다. 호텔의 대리석 욕조에는 먼지 하나 묻어있지 않은 듯 윤기가 반질반질한데, 그곳에 물을 가득 받아 몸을 담굴 때면 마치 스스로가 영화 속의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이 든다. 게다가 물이 찰랑 거리는 소리 외에는 고요한 화장실 안에서 난 일종의 평화를 느낀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속세와 육아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자아와 마주하는 시간처럼 여겨진다.
목욕을 마치고 나오니 어느덧 창 밖이 어둑해졌다. 58층 뷰는 밤이 되어서야 더욱 진가를 발휘한다. 라라랜드 OST의 한구절이 떠오르는 밤이었다. 'City of Stars, Are you shining just for me.' 불빛들이 별처럼 반짝여 LA 다운타운을 환하게 밝혀주고 있었다.
남편이 저녁 겸 야식으로 먹을 음식을 픽업간 동안 아이 재우기에 돌입했다. 책을 읽어주고, 어르고 달래 재우는 데만 1시간이 넘게 소요됐다. 아들도 기분이 들떴는지 좀처럼 쉽게 잠들지 않아 애를 먹었다. 애를 재우고 나오자 거실에서 남편이 음식을 셋팅하고 나를 기다렸다.
그날의 만찬은 회.
누군가 그랬다. 미국에서 한국인이 가장 살기 좋은 도시는 LA라고. 이에 반문할 수 없다. LA 한인타운에는 없는 게 없고, 심지어 CGV 영화관까지 있다. 먹고 싶은 한국 음식은 한인타운에만 가면 웬만하면 사먹을 수가 있다. 타지에 살면서 가장 힘든 일은 먹고 싶은 한식을 먹을 수 없고, 고국에 대한 향수를 느낄 때인데, LA 한인타운에 가면 향수가 어느 정도 해소되기 때문에 LA만큼 한국인들에게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주는 곳은 없는 것 같다(물론 한인사회가 몹시 좁기 때문에 관계에서 느끼는 피로함을 호소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남편과 화이트 와인을 마시며 도란도란 이야기 꽃을 피웠던 밤.
오래 전 아이를 낳기 전 남편과 단 둘이 떠났던 어떤 여행지들의 밤들과 견줄만한 근사한 밤이었다.
호텔의 다른 시설들은 전혀 이용하지 못했으니(조식 불가, 룸서비스 불가, 식당 영업 중단 등), '호캉스'도 아닌 '룸캉스'였지만 여행에 대한 갈증을 날려버릴 수 있었던 일박이일이었다.
생각해 본다. 여행을 꿈꾸는 일은 팍팍하고 반복되는 일상으로부터 잠시 벗어나기 위함인데, 집을 떠나 낯선 곳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일 또한 일상으로부터 탈피해 자유를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여행과 닮은 점이 많다고.
사실 집에서 있을 땐 이곳 저곳에 너저분하게 돌아다니는 정리해야 할 물건들 때문에 아무 것도 하고 있지 않아도 약간의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느낀다. 막상 청소하진 않으면서, 청소해야 하는 압박으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한 것이다. 게다가 삼시세끼 가족들과 밥을 해먹고 설거지를 하다보면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겠다. 때문에 호텔에 짐을 풀고 집안일, 요리, 청소로부터 벗어나 낯선 장소에 왔다는 기분을 느끼는 일만으로도 행복감을 느낄 수 있었다.
룸캉스만으로도 정말,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