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를 들으며 추억여행 떠나기

배미향의 저녁스케치를 들으며

by Iris Seok

실로 오랜만에 저녁 약속이 있던 날이었다. 남편없이 나 홀로 밤길 운전을 한 건 코로나19가 터진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밤 운전을 하고 있으니 문득 한국에서의 삶이 스치고 지나갔다. 한국에선 밤 운전을 할 일이 비교적 잦았으니까.


최근 한국에 방문해 운전을 하다 라디오에서 ‘배미향의 저녁스케치’가 흘러 나왔는데 그제서야 한국에 왔다는 게 진하게 실감됐다. 한국에서 대학원을 다니던 시절, 늘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듣던 ‘배미향의 저녁스케치.’ 저녁 6시부터 8시까지 CBS 음악FM에서진행되는 프로그램. 잔잔하게 흘러나오는 올드팝과 배미향 아나운서님의 목소리에 취해 그리고 따뜻한 사연들로 채워진 방송을 듣다 보면 그 빽빽하게 차가 막히던 도로 위에서도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오히려 집에 조금만 더 늦게 도착했으면, 하고 바랄 때도 있었다. 라디오를 끄고 싶지 않은 까닭이었다.


그 기분을 미국에서도 다시 느끼고 싶어 유튜브에서 배미향의 저녁스케치를 검색해 가장 상단에 떠있는 영상 하나를 클릭했다. 2017년1월2일자 새해의 첫 월요일 방송의 녹음본이었다. 새해 인사를 건네는 배미향 아나운서님의 감미로운 클래식 선율 같은 목소리에 2020년의 내가 3년 전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되돌아간 것만 같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꿀을 발라 놓은 듯 달콤하고, 우아하고, 고귀한 울림을 가지고 있다.


라디오에선 ‘새해를 맞아 이전과 다를 바 없는 똑같은 하루일지라도 기분 좋고 설레게 느껴진 하루였다’는 사연들이 연달아 등장했다. 시선이나 감정, 마음가짐까지 바뀌는 새해의 첫날 풍경에 대한 설명을 들으니 불현듯 2020년의 새해 첫날도 기억이 났다.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던 때였다. 그때만 해도 2020년 한 해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했고, 이번 해에 아주 특별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 벅차 오르는 감정을 느꼈다. 바이러스 때문에 한 해를 통째로 날려버릴 줄은 상상도 못했던 과거의 나와 가족, 친구들을 기억하며 허탈한 미소가 지어졌다. 생은 이토록 예측 불허하다는 진리를 다시금 깨닫는다.


라디오에서는 잇따라 ‘2017년에 ~하게 해주세요’라는 소망이 담긴 사연들도 배미향 아나운서님의 다정한 목소리와 함께 읽혀졌다. ‘경제가 더 나아지기를, 자녀가 특목고에 가기를, 친구들 8명 모두 다함께 여행갈 수 있기를….’ 그들의 소망은 그 해에 이뤄졌을까? 내겐 방금 스쳐 지나간 이름 만으로 존재하는 그들의 안부가 새삼 궁금해지던 밤이었다.



배미향의 저녁스케치의 선곡은 베스트 오브 베스트다. 워낙 이전부터 올드팝을 좋아했던 나였다. 과거 지하철을 타고 어디론가 향하다 보면 올드팝 모음 씨디를 파는 아주머니가 달리는 전철에서 ‘추억의 올드팝이 담긴 음악 씨디 한 장에 만원’이라고 소리치시곤 했는데, 번쩍 손을 들어 아주머니 손에 만원 짜리 지폐 한 장을 건넸던 기억이 난다. 옆자리에 함께 앉아있던 친구는 이런 씨디 지하철에서 구입하는 사람 처음 본다면서 킥킥댔다. 친구가 웃거나 말거나 난 그 씨디가 참 좋았다. 아침마다 씨디에 담긴 올드 팝송들을 듣고, 흥얼거리며 화장을 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내친김에 친구들과 헤어진 후 새벽녘 집에 돌아와 랩탑을 켜고 배미향의 저녁스케치를 검색해 봤다. ‘노을 속에 흐르는 추억의 팝송’이라는 슬로건. 정확하게 프로그램을 묘사하는 문장이었다. 20년간 장수해온 해당 프로그램답게 40~60대의 탄탄한 팬 층이 형성돼 있다는 기사도 눈에 띄었다. 그 팬들 중에는 우리 엄마도 포함돼 있을 터였다. 어느 날 집에 도착해 “엄마, 배미향의 스케치 들으며 왔는데 너무 좋더라. 틀어주는 올드 팝송도 내 스타일이고, 사연들도 좋아”라고 말하자 엄마는 자신 또한 오랜 기간 배미향의 스케치를 들어왔다고 말했었다.




그러고 보니 40대였던 엄마의 모습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부엌에서 라디오를 들으며 다섯 식구들을 먹일 저녁을 차리던 분주한 엄마의 모습. 그 때 엄마가 듣던 라디오 프로그램은 배미향의 저녁스케치였을까. 그랬을 것이다. 저녁을 차리던 시간이 딱 저녁 6시부터 7시 사이였기 때문에 정확히 엄마는 배미향의 저녁스케치를 들으며 된장찌개를 끓이고, 나물을 무치고, 식탁 위에 수저와 젓가락을 올려 뒀을 것이다.



멀게만 느껴졌던 엄마의 모습을 지금의 나 역시 갖추고 있다. 식구들을 위해 밥을 차리고, 설거지를 하는 일은 내 일상의 일부가 됐다. 영원히 철없는 부모님의 딸로만 살 줄 알았는데, 이제는 누군가의 아내,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한 가정을 책임지며 하루를 살아간다.



과거의 기억들을 곱씹다 보면 생이 멈추지 않고 앞을 향해 빠르게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문득 뼈저리게 실감하곤 하는데, 그럴 때면 과거에 대한 향수에 사로잡혀 왠지 모르게 마음 한 편이 찡해진다. 시간은 나이가 들수록 가속도가 붙는다는 옛말을 나이가 먹을 수록 몸소 체험하고 있는데, 폭주기관차처럼 앞을 향해서만 달려가는 시간을 지금 여기에 붙잡아 두고 싶다. 때때론 지나쳤던 과거의 어느 순간들로 잠깐만 되돌아가고 싶기도 하다.



새벽녘 감성적인 기분에 사로잡히게 된 건 다 배미향의 저녁스케치 탓이다. 라디오는 나를 한국으로 그리고 옛 시절의 어떤 순간으로 데려다 줬다. 이 기분이 싫지 않았다. 싫기는 커녕 아주 행복했다. 휴대폰에 ‘CBS레인보우’ 앱을 다운받는다. 때때로 배미향의 저녁스케치를 들어야겠다. 아나운서님의 목소리, 사연, 올드 팝송, 그 어느 것 하나 버릴 게 없다. 내게는 최고의 라디오 프로그램이다. 부디 오래오래 장수해 주세요. 미국에 거주하는 30대 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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