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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ris Seok Mar 02. 2021

미국에 사는 장손 며느리의 제사상 차리기

제사의 의미

나는 장손의 며느리다. 이 사실을 결혼 전부터 인지하고 있었다. 결혼 전 남편은 자신은 장손이기 때문에 아들을 낳아야 한다고 말했었다. 남편 스스로는 딸, 아들에 대한 별다른 선호도가 없는 사람이지만, 본인이 장손이라는 이유로 대를 잇기 위해 아들은 낳아야 한다고 했었다. 현대 사회에 이 무슨...!


하지만 남편의 말에 난 별다른 토를 달지 않았는데, 아마도 태어나서부터 줄곧 할머니와 함께 살며 알게 모르게 옛 어른들의 마음가짐과 생각을 고스란히 세뇌받았기 때문일테다. 엄마는 둘째 며느리임에도 불구하고 할머니를 26년간 모시고 살았다. 할머니를 모시고 산다는 이유로 집안의 모든 제사 또한 엄마가 도맡아 지냈다.


명절을 포함해 일년에만 10번 가까이 제사를 지냈던 엄마. 모두들 이런 며느리 또 없다며 칭찬했지만 할머니에겐 부족한 며느리였던지 할머니로 인해 엄마가 눈물 짓던 나날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럼에도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엄마는 무척이나 할머니를 그리워했다. 본인 친정 엄마보다 더 오랜 기간 함께 살았던 시어머니이니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었으리라.



딸은 엄마 인생을 닮는다더니 난 장손의 며느리가 됐고, 엄마처럼 제사를 지내게 됐다.





엄마와 내가 다른 점이 있다면 나는 엄마처럼 일년에 10번씩 제사상을 차리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나는 일년에 딱 한 번 제사를 지낸다. 미국에서 우리 가족만 단촐하게 살고 있기 때문에 참석할 가족도 따로 없고, 집안 어른들도 안 계셔서 명절이나 먼 조상의 제사까지 챙기진 않는다. 하지만 살아생전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남편의 아버지, 즉 나의 시아버지의 제사는 내가 지낸다.


남편은 10대 시절 위암으로 투병하던 아버지와 작별했다. 아버지의 부재로 남편은 오랜기간 완벽한 가족 구성원을 가진 화목한 가정에 대한 로망을 품게 됐을까? 막연히 상상할 뿐이다. 말이 없는 남편은 아버지의 부재로 인해 살게 된 이후의 삶에 대해 구구절절 언급을 하진 않았다. 하지만 남자나이로 스물 여덟, 비교적 이른 나이에 결혼을 한 사실만 보아도 남편은 자신만의 가정을 꾸리는데 굉장히 적극적이었다. 남편을 사랑했기 때문에 결혼에 별다른 뜻이 없었던 나는 스물 일곱에 결혼을 하게 됐다.


결혼 후 한국에 살았을 때는 시아버지의 기일이면 아버님의 산소에 찾아가 인사를 드렸었다. 그러다 LA에서 연애했던 우리 부부는 다시금 운명처럼 이곳으로 오게 됐고, 미국에서 시어머니도 시언니 가족도 없이 우리끼리 아버님의 기일을 챙기게 됐다.


초보 며느리인 나에게 제사는 다른 세상 영역 마냥 어렵게 느껴졌으나 나에게는 든든한 친정엄마가 있었다. 마침 나의 친할머니 기일과 시아버지의 기일이 이틀 차이여서 매년 엄마와 함께 제사 준비를 할 수 있었다. 미국으로 넘어온 이후에도 엄마, 아빠가 설날연휴 기간에는 미국에 방문하셨으므로 대체로 함께 제사 준비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올해는 코로나19로 인해 엄마의 도움을 전혀 받을 수 없게 됐다.


엄마에게 카톡으로 제사 준비물 목록을 전달받아 장부터 봐왔다. 나의 부주의함 때문이었는지 한인마트에서 밤과 곶감은 발견하지 못해 상에 올릴 수 없었다. 일단 아버님이 살아생전 좋아하셔서 늘 제사상에 올려졌다는 '닭고기 미역국'과 갈비찜, 동그랑땡, 삼색나물, 과일 등을 준비하기로 했다.


남편은 "제사는 고인을 기리기 위함이지, 과거처럼 틀에 박힌 제사상을 차릴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점차 제사상은 간소화될 수 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남편은 자유롭게 우리집에 적합한 제사상을 차리자고 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피자, 햄버거를 올리기에는 좀 너무 막나가는 것 아닌가 걱정이 됐다. 아무리 생략을 하더라도 기본은 해야한다는 마음이었다.




아침부터 남편과 함께 제사 음식들을 준비하며 아버님에 대해 물어봤다.


"아버님은 어떤 분이셨어?"


"아버님과 즐거운 추억은 뭐야?"


"아버님은 정말 닭고기 미역국을 즐겨 드셨어?"


평소에는 기억나지 않는다며 아버지 이야기를 잘 하지 않던 남편은 제사 음식을 준비하며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이것 저것 떠올렸다. 아버지는 선비같은 분이셨고, 자상했다고 남편은 말했다. 아버지에게 혼난 기억 조차 없다고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제사라는 게 빛바랜 과거의 문화유산 같지만
고인을 떠올릴 수 있는 날이라는 점에서 의미있다

휴대폰 너머 엄마와 아빠는 "제사를 준비할 때는 축제를 준비하듯 즐거운 마음으로"라고 강조하셨다. 늘 제사를 지냈던 엄마를 보고 자라서일까. 시어버지의 제사를 지내는 일이 경건한 하나의 의식을 치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실제로 만나뵙지는 못했지만, 이렇게라도 일년의 하루는 며느리로서 시아버님 앞에 인사드리는 것 같았다. 시아버님께 우리 남편, 아이들 잘 보살펴 달라고 부탁드리고 싶었다.


제사 당일에는 제사상에 올라가려는 두 아이들을 붙잡느라, 요리하느라 도통 정신이 없어 이번 제사에서 놓친 부분이 많다.엄마와 페이스톡을 통해 상차림 방법을 들었는데, 커뮤니케이션의 오류로 북어포 방향을 반대로 두는가 하면, 밥과 국의 위치도 반대로 두는 실수를 했다. 떡의 위치도. 남편은 그런건 다 상관없는 일이라고 했지만 이왕 제사상을 차리는 김에 조금 더 완벽하고 싶었는데. 내년을 기약해봐야겠다.


미국에서 장손 며느리로서 지내는 제사.

여전히 옛 문화에 이질감을 느끼기는 하지만, 그래도 가족들끼리 한 마음으로 고인을 추억할 수 있어 좋은 점도 많은 것 같다. 미국에서 자라는 아이들에게 한국 문화를 체험하게 해준다는 점에서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앞으로도 이 마음 그대로 불평불만 없이 즐겁게 제사상을 차리는 장손 며느리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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