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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ris Seok Apr 16. 2021

아시안 증오범죄, "그래도 상관없다"

미국에서 일어나는 아시안을 향한 인종차별과 범죄

역사가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History has failed us, but no matter)



소설 <파친코>의 첫 문장이다. 이 소설은 의미심장한 첫 문장의 독자들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2017년 전미 도서상 최종 후보에 오르고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각종 외신이 '올해의 책'으로 꼽으며 미국 출판계를 뒤흔들었던 이 소설은 애플TV 드라마로도 제작될 예정이다. 윤여정, 이민호 배우 등이 캐스팅 돼 벌써부터 기대감을 모으고 있다. 


소설은 구한말부터 4대에 걸친 재일교포의 삶을 역사적 배경과 함께 생생하게 그려냈다. 저자 이민진은 7살 때 가족들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 온 재미 한인으로 내국인이면서 끝내 이방인일 수 밖에 없었던 재일교포의 처절한 삶을 동일한 이민자의 시선에서 써내려갔다. 


저자는 한국인이라는 '민족성'의 이유로 같은 반 친구들에게 혐오를 받고 끝내 스스로 숨진 재일교포 중학생 소년의 이야기를 듣고 충격을 받아 소설 집필을 결심하게 됐다고 밝혔다. 소년은 같은 반 친구들에게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 '너에게 김치 냄새가 난다' 등의 비난을 받았다. 


소설을 읽고 한 동안 헤어나오지 못했던 이유는 소설 속 주인공이나 내가 타국에서 살아가며 인종차별의 피해자라는 동질성 때문이었다. 


유학생으로 미국이라는 땅에 와서 살았을 때만 해도 '인종차별'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한인 또는 아시안 친구들끼리 어울려 놀았고, 학교라는 바운더리 내에서만 주로 생활했기 때문에 진짜 미국사회를 경험해 보지 못했다. 학교가 미국의 전부인 줄로만 알았던 그 때는 '인종차별'이 있기야 있겠지만, 교과서에서 나오듯 그리 심각한 수준은 아니다, 라고 가볍게 여기고 이에 대한 별 다른 의견이 없었다. 


사실 이런 관념은 30대에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한인 미디어 정치부 기자로 일하며 내가 접하는 대부분의 미국인은 정치인들 또는 정치계 후보들이다. 인터뷰를 하기 위해 만나면 그들은 조금이라도 더 듣기 좋은 말을 하기 위해 노력한다. 당연하지 않은가. 한인들의 표를 받기 위해 인터뷰를 하는 중인데, 무례한 행동으로 소중한 한 표를 잃고자 하는 정치인이 있을리가 만무하다. 


그러다 최근에서야 인종차별을 몸소 실감하고 있다. 아니,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미 은밀하게 인종차별을 일상 속에서 느껴 왔으나, 이제서야 그 불편한 감정을 수면 위에 띄우고 대면하게 된 것이다. 숨겨왔던 불편함, 애써 감춰오던 감정, 인종차별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애틀란타 총격사건이 일어난 2021년 3월16일. 그날 써야할 기사를 다 마감하고 오후 6시 퇴근을 하려는 와중에 국장님께 다급하게 연락이 왔다. "애틀란타에서 총격사건이 벌어졌는데, 피해자가 한인이라는 제보가 있다"고. 총격사건의 피해자가 한인...? 부랴부랴 노트북을 다시 켜서 애틀란타 총격사건 외신 기사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외신에서는 아시안 스파 세 곳에서 총격사건이 벌어졌는데, 피해자의 신원은 밝혀지지 않았다고 보도된 상황이었다.


그러나 애틀란타에 거주하는 한 제보자로부터 온 정보는 사실이었다. 총격사건으로 인한 총 8명의 피해자 가운데 6명이 아시안 여성, 그리고 이중 4명이 한인 여성이었다. 아시안 증오범죄의 피해자로 죄없는 한인 여성이 하루 아침에 숨졌다는 충격적인 사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쿵푸 바이러스'라며 코로나 바이러스의 원인을 중국으로 몰아가며 거침없는 비판을 했을 때 남의 나라 일처럼 바라보던 과거의 내가 부끄러웠다. 미국에서 한인, 중국인, 일본인에 대한 구분이 무슨 필요일까. 어차피 '아시안'일 뿐인데. 


그날을 기점으로 아시안 증오범죄에 대한 기사가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시애틀에서 길을 걸어가던 한인 노부부가 10대 흑인 소년들에게 주먹질을 당하는 가 하면, 캘리포니아의 한 은퇴자 타운에 거주하던 한인 남성이 숨지자 가족들에게 익명으로 '너희 나라로 떠나라'라는 편지가 배송되기도 했다. 



아시안이라는 민족성의 이유로 차별받는 일. <파친코> 소설 속 재일교포들의 삶과 겹쳐져 소설을 읽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현실은 소설 보다 더 잔혹하니까. 


최근 미주 한인 이민자들의 삶을 그린 영화 <미나리>가 각계 영화제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영화는 잔잔한 편이라 큰 재미를 느끼긴 힘들었지만, 그럼에도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공통점으로 인해 남편과 나는 깊게 집중해서 영화를 볼 수 있었다. 올해로 118주년을 맞이한 미주 한인 이민사. 100년이 하고도 18년이 지난 지금, 미국 내 한인의 위치는 어디인가? 


3월 27일 LA 한인타운의 한 도로에서는 아시안 증오범죄를 규탄하는 시위가 열렸다. 이 시위에는 한인 뿐만 아니라 히스패닉, 흑인계 등의 정치인, 시민들이 다수 참가한 시위였다. 시위 현장 취재를 나가서 한인 뿐만 아니라 타인종들도 많다는 점에 놀랐다. 전문가들의 조언이 떠올랐다. 아시안들이 미국 내 증오범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리끼리 무언가를 하는 것도 좋지만 우리와 비슷하게 차별과 범죄에 노출된 타인종 커뮤니티와 연대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날 시위는 조지 플로이드 사건 때와는 사뭇 다른 평화적인 시위였다. 장구와 꽹과리가 등장해 흡사 축제의 한 장면같기도 했다. 여러 외신들이 취재를 와서 보도를 했고, 한 번의 시위로 무엇이 달라지겠느냐 싶겠지만 아시안도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점을 조금이라도 세상에 알렸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파친코> 소설 저자는 소설 첫 문장에 책의 주제가 담겨 있다고 설명한다. 역사가 때때로 우리를 좌절시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고. 이건 체념의 말이 아니다. 그 부당한 역사에 개의치 않고 '잘' 살아내는 게 포인트다. 타지에 거주하는 이민자들은 코로나19 사태 속 아시안 증오범죄가 번번이 일어나는 부당한 역사의 현장에서 현재진행형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 '그래도 상관없다'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 침묵하지 않고, 꿋꿋하게 차별에 맞서 연대하며 나아가는 것, 그게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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