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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ris Seok Mar 28. 2021

30대, 다시 치는 피아노

체르니40은 쓸모없어졌지만

그 시절, 피아노를 배운 사람들끼리 국룰 질문이 있다.


너 체르니 어디까지 쳤어?


'체르니'를 몇 번까지 쳤냐는 질문 하나면 상대방의 피아노 수준, 피아노를 배운 기간 등을 한 번에 파악할 수 있다. 그래서였을까. 십대 시절의 난 체르니를 40까지 배웠다는데 일말의 얄팍한 자부심을 느꼈다. 피아노 좀 배웠다 이거야, 이런 마음.


그런데 바이엘-소나타-모차르트-체르니30, 40에 이르기까지 난 피아노 치는 재미를 단 한 번이라도 느낀 적이 있었을까?


어릴 땐 피아노 학원 가기가 참 싫었다. 연습 후 사과모양을 대각선으로 그으며 열번씩 같은 곡, 같은 부분 반복해 피아노 연습을 하는 숙제도 지겨웠다. 한 번 연습하고, 사과모양을 세 개씩 지워버리는 일은 그 시절 누구나 한 번쯤 해본 일이 아닐까. 친구들과 놀이터에서 탈출을 하며 노는 일이 훨씬, 정말이지 피아노 치는 일과는 비교대상도 되지 않을 만큼 재밌었다. 피아노 치는 일은 전혀 즐겁지 않았지만, 다만 엄마가 시켜서, 그리고 거의 모든 아이들이 배우는 악기니까 피아노 학원을 다녔을 뿐이었다.


공부에 할애하는 시간이 더 커져버린 중학생이 되자 마자 난 피아노 학원을 끊었다. 그 이후로 우리 집에서 피아노는 고물단지 신세가 되었고, 그러다 언젠가 집에서 영영 자취를 감추게 됐다.




그런데 성인이   집에서 사라져버린 피아노에 대해 이따금씩 생각하게 됐다.  피아노는 그냥 피아노가 아니었다. 할머니가 쌈짓돈을 모아 손녀에게 사준 피아노였다.  시절 할머니는  내게 그토록 피아노를 사주고 싶어하셨던걸까? 할머니는 여자아이다룰  있는 악기가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고 그렇게 생각했던  같다. 그리고  악기가  국민이 모두 배운다 해도 과장이 아닐 피아노였으면 했던 것이다.


친정 부모님이 손주에게 피아노를 사주고 싶다며, 내게 피아노 과외선생님을 구하는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을 때 자연스레 할머니가 사준 그 시절의 피아노를 떠올리게 됐다. 우리 엄마 아빠도 어느덧 할머니 할아버지의 나이가 되어, 그 시절 나의 할머니처럼 손주에게 피아노를 사주려 하시는구나. 한 세대가 지나도 비슷한 일은 반복되는구나. 어쩌다 내가 이렇게 나이들어 버렸지. 나도 할머니가 사준 피아노를 치던 시절이 있었는데, 이런 식의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부모님께서 사주신 다는데 피아노를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그리고 나 역시 실로 오랜만에 피아노가 치고 싶었다.


급하게 아들의 피아노 과외 선생님을 구하고, 피아노를 구입했다. 할머니가 사주셨던 피아노를 버렸듯, 엄마 아빠가 나의 아들에게 사준 피아노를 버리는 실수를 저지르고 싶지는 않아 예쁜 모양의 실용성이 높은 전자 피아노로 택했다. 혹여 아들이 피아노에 재능을 보인다면 그때가서 제대로 된 피아노를 사도 늦지 않겠다는 남편의 강력한 주장도 한 몫해 야마하에서 나온 흰색 전자 피아노를 구입하게 됐다.


피아노를 집에 들이고 누구보다 신난 건 다름아닌 나였다. 아이들이 피아노에 보이는 흥미는 높았지만, 아직 제대로 된 소리를 낼 수 없는 아이들의 집중력은 금세 다른 장난감으로 넘어가기 일쑤였다. 나야 말로 오랜만에 쳐보는 피아노에 흥미가 들끓었다. 다시 피아노를 제대로 배우고싶다, 라는 강렬한 욕구가 뒤따랐다. 아름다운 선율을 내 손으로 내보고 싶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니 체르니를 40까지 배운 일은 전혀 쓸모없는 일이 돼 있었다. 난 어느새 까막눈이 됐다. 높은 음자리표는 읽을 수 있지만, 낮은 음자리표는 읽을 수 없게 됐다. 낮은 음자리표는 '도'부터 천천히 새어가며 읽을 수 있는 딱 그 수준이 됐다. 부정할 수 없는 악보 까막눈. 글을 읽지 못하는 심정이 이런 것일까.


피아노를 그만둔 뒤 오랜 시간이 지났으니 까막눈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뭐 괜찮다. 요즘 세상은 너무 좋아져서 피아노 선생님을 따로 구하지 않아도 당장 집에서 유튜브 영상으로 배우는 일이 가능했다. 자세하고 쉽게 피아노 레슨을 해주는 유튜버들을 몇 명 구독하고, 익숙한 곡들을 따라 치기 시작했다.


일단 가장 먼저 히사이시 조의 '썸머'라는 곡을 첫 목표곡으로 정했다. 워낙 여름을 좋아하기도 하고, 그럭저럭 따라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물론 원곡을 그대로 치기에는 현재의 내 실력으로는 무리가 있었고, 유튜버 선생님이 '중급'으로 올려주신 영상을 보고 따라했다. 유튜버 선생님이 제공하는 악보에는 음계명이 다 쓰여 있었기 때문에 까막눈인 내가 따라하는 데 수월했다.



아이들이 잠든 시간 헤드폰을 껴고 나 혼자 피아노를 연습한 지 몇 주일차.


30대가 되어 다시 치는 피아노의 매력은 무궁무진했다. 무엇보다도 가장 좋은 점은 '잡생각'을 사라지게 해준다는 점이다. 특히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은 요즘, 내 생각의 흐름은 과거의 어느 순간 또는 먼 미래의 어느 순간으로 흘러가 이따금씩 나를 괴롭히곤 했다. 말 그대로 하지 않아도 좋을 '잡생각'이 어느새 내 일상을 파고들어 나를 감정의 노예로 만들곤 하는 것이다. 긍정적인 생각으로 하루를 가득 채우고 싶은데, 한 번 잡생각에 휘어 말리고 나면 감정에 이끌려 다니기 십상이다.


피아노 연습은 꼬여있는 감정의 실타래에서 나를 꺼내줬다. 악보를 따라하고, 피아노에서 흘러나오는 아름다운 소리를 감상하고, 자꾸 틀리는 부분을 연습하는 일. 그래서 보다 완벽해진 연주를 하는 일은 나를 피아노 연주에 몰입하게 했고, 그 순간만큼은 피아노 연주 이외의 그 어떤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피아노를 치고 싶다, 연습하고 싶다, 그 단순한 감정 뿐이었다.


나도 모르게 피아노 연습을 하다보면 한 시간이 훌쩍 지나있곤 했다. 어깨가 좀 결리긴 했지만, 하루의 스트레스가 해소되는 기분도 분명 있었다. 생각이 맑아지니 깊은 곳으로부터 개운함을 느꼈다. 그게 너무 좋아서 누가 시키지도 않는 피아노 연습을 매일 하고 있다.


이렇게 사람은 달라지나 보다. 그 시절 알았으면 더 좋았을 감정이지만, 모든 건 때가 있으니까. 이제라도 진심으로 피아노를 연습하고 배워서 스스로를 치유해줄 음악들을 연주하며 살아가고 싶다. 피아노 연주는 내게 주는 선물이다. 아직 내게 남은 생은 길고, 이제 다시 피아노를 친다해도 늦진 않았으리라, 고 믿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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