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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ris Seok Apr 21. 2021

서재, 내 든든한 빽

마음이 힘들면 서재로 간다

디즈니 영화 <미녀와 야수>를 보던 중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바로 야수가 벨에게 서재를 선물해 줬던 장면. 영화관에서 그 장면이 나오자 심장이 쿵쾅쿵쾅 뛰고 나도 모르게 입이 쩍 벌어졌다. 상상 속에서만 꿈꾸던 '서재'의 모습과 흡사했을 뿐더러 책 읽기를 좋아하는 벨에게 서재를 선물하는 야수의 배려에 감동해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 장면은 뇌리에 또렷하게 박혀있다. <섹스 앤더 시티>에서 빅이 캐리에게 만들어 준 드레스룸 보다 야수가 벨에게 선물한 서재가 훨씬 더 부럽다는 생각을 했다.

디즈니 <미녀와 야수> 영화 캡처


결혼을 하고 내 가정을 꾸린 후 가장 큰 로망이 있다면 나만의 서재를 갖는 일이었다. 글쓰기가 업이기도 하거니와 책을 읽는 일은 내 삶에서 가장 큰 활력을 더해 주는 일이다. 특히 아이를 낳아 키우며, 혼자만의 시간이 거의 사라지자 과거보다 더욱 책 읽기에 집착하게 됐다. 책만이 나를 현실에서 벗어나 다른 곳으로 도망갈 수 있게끔 해줬다. 책을 읽을 때면 나는 치열한 현실로부터 벗어나 온전히 나의 자아와 마주하고, 내 세계 너머의 다른 세계를 보게 된다.


감사하게도 최근 교외 전원주택으로 이사를 하면서 꿈에 그리던 서재를 갖게 됐다. 텅빈 집을 보러 갔을 때부터 "2층 거실은 무조건 내 서재"라며 남편에게 강조했다. 지금와서 되돌아 보면 남편은 그 공간에 TV와 소파를 두고 편히 쉴 장소를 만들고 싶어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재택근무를 하고 있기 때문에 일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아이들과 공부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는데도 서재의 존재는 절대적이라는 내 말에 남편은 순순히 응해줬다.


이사를 한 지 4개월 만에 완성된 서재. 코로나19 시국인지라 가구 배송이 워낙 느려 생각보다 더 늦게 완성된 서재와 마주할 수 있었다. 주기적으로 책을 구입하는 탓에 이사 전만 해도 책꽂이에 책을 다 꽂아둘 수 없어 집안 구석구석 책들이 쌓여 있었다. 남편은 굴러다니는 책들을 보며 한숨을 쉬기 일쑤였고, '책 한 권을 살 때마다 두 권씩 버려라!'고 엄포를 놓았지만, 책을 처치하는 일은 내게 너무도 어려운 일이었다. '이 책 한 번 더 읽고 싶은데...' '언젠가 또 읽고 싶어지면 어쩌지?' 등의 생각으로 난 쉽사리 책을 놓아줄 수 없었다.


서재가 생기자 상황은 판이하게 달라졌다. 책을 꽂을 공간이 넘치다 보니 내가 소유한 책이 상대적으로 빈약하게 느껴졌다. 텅빈 서재 공간을 보며 앞으로 책을 사는데 문제는 없겠다 싶어 숨통이 트이는 한편, 빨리 빈 공간을 채우고 싶어 책을 구입하는 주기가 짧아졌다. 읽고 싶은 책은 무수하고, 꽂아둘 공간은 넉넉하니 마음의 풍요가 흘러 넘치는 듯 했다.


아이들을 재우고 이르면 오후 9시, 적어도 오후 10시가 되면 서재에 온전히 나 혼자 있을 수 있게 된다. 아이들이 깰 수도 있으니 아주 조용하게 클래식을 틀어 놓고 읽고 싶은 책을 한 두 권 꺼내온다. 책을 읽으며 기록하고 싶은 감정과 생각들을 일기장에 적는다. 그 시간들 속에서 난 완전하게 치유받는다고 느낀다.


살다보면 유독 힘든 날이 있기 마련이다. 마음이 다칠 일은 수두룩하다. 가령 최근에는 취재원으로부터 항의전화를 받고 마음에 허기가 찼다. 내가 하는 일이 과연 바른 일이었을까? 내가 쓴 기사가 괜한 논란을 키운건 아닐까? 여러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내게 선택권은 없었다. 기자도 한 회사의 일개 직원일 뿐이고, 기사를 신문에 실을지 말지의 여부는 데스크의 영역이다. 취재원이 아무리 내게 따지고 윽박질러도 이미 내 손을 떠난 기사를 나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


부당하게 누군가로부터 비난 받았을 때, 육아로부터 몸과 마음이 탈탈 털렸을 때, 괜시리 타지에서 향수로 몸부림 칠 때면 언제나 난 서재를 향했다.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내 마음 상태를 일기장에 손으로 기록하며,
나는 나를 위로할 수 있었다.

서재에서는 세상의 소음으로부터 조금은 벗어난 것만 같았고, 나만의 세계에 들어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곳에서는 그 누구도 나를 방해할 수 없다. 나는 평소에는 돌보지 못했던 내 내면을 들여다보고, '괜찮니?'라고 질문했다. 그리고 내게 가장 필요한 위로의 말들을 건넸다. 나를 위로할 수 있는 건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었다.


서재 덕분에 육아로 인한 피로감도 한결 나아졌다. 아이들이 싸우거나, 말을 듣지 않아  힘들게  때면 이런 생각을 한다. '조금만  참으면 아이들  테고,  서재로   있다!' 그러면 약간의 평정심을 되찾을  있게 된다. 하루 끝의 보상이 남아있기 때문에 사람이 조금  너그러워지게 되는 것이다.


이따금씩 마음이 힘들면 난 어김없이 서재를 떠올린다. 서재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지금의 이 힘든 감정은 오늘 밤 서재 위에서 사라질 것이라고. 그러니 난 괜찮다고, 그렇게 나를 달랜다.



서재를 빽으로 오늘도 굳건하게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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