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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ris Seok Sep 23. 2021

인생에는 '그저 그런' 시기가 있다

그저 그런 듯 싶지만 그저 그렇지는 않은


30대의 시기를 관통하고 있는 나는 이따금씩 초조함과 불안을 느낀다. 철학자 알랭 드 보통이 책 <불안>에서 다뤘던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모두가 지니고 있다는 그 '불안'은 유령처럼 내 어깨에 딱 들러붙어 나를 졸졸 따라 다니는 것만 같다. 이유도 없이 불안감이 엄습하는 밤이면 서재에 앉아 일기를 쓰며 스스로에게 묻는다. '너 왜 이렇게 초조한 거니.'


내가 느끼는 불안의 주요 원인은 어디에 있나. 아마도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현재의 삶에 대한 허무함, 이상과 현실의 간극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되돌아보면 10대, 20대의 나에게는 활을 명중할 뚜렷한 과녁이 존재했다. 되도록이면 과녁의 9점과 10점을 맞추기 위해 무던히도 활을 쏘아올리던 시기였다. 대학 진학, 대외활동, 인턴, 취업, 결혼, 출산 등등 마치 끝없는 도장 깨기를 하는 사람처럼 목표물을 꾸준히 업데이트 하며 앞으로 전진했다.


그런데 타겟으로 했던 도장들을 다 깨버린 지금, 다음에 깨야할 도장은 어디지? 하며 두리번 대는 나를 발견한다. 나는 목표가 없는 삶에 익숙하지 않은 것이다. 인생의 장기 목표는 있지만, 단기 목표가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나는 끝없는 불안감에 사로잡히고야 만다. 매일 똑같은 그림을 반복해 그리는 화가 마냥 일상의 권태로움은 현재 내 인생이 '그저 그런' 것만 같은 자괴감에 빠져들게 했다.


 



그러다 최근 한 선배를 만났다. 취재 차 만나게 된 변호사인데, 알고보니 과거 같은 언론사 기자였다는 사실을 알았다. 함께 일한 적은 없지만 같은 곳에 소속되어 있었다는 공통점이 그와 나를 선배와 후배 사이로 만들어줬다. 우리는 공통적으로 아는 분들에 대해, 그리고 그간 취재했던 분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누구는 지금 뭐한다더라, 어떻게 지낸다더라 등 여러 이야기가 오고갔다. 그리고 문득 깨닫는다. 일부의 사람들이 과거에는 상상 조차 못했던 크나큰 성취를 이뤘다는 사실을.


수십년 간 정치인의 보좌관으로 살았던 누군가는 현재 연방 하원의원이 됐거나 시의원이 되어 있었다. 과거 선배에게는 보좌관이었던 누군가가 내가 일하고 있는 현재에는 정치인으로 활약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선배가 일했던 10년 전만 해도 미국 내 한인 정치인은 굉장히 드물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보좌관이었던 그들이 정치인으로 선출될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현재 연방의회에 4명의 한인 연방 하원의원이 존재하는 사실은 여전히 놀랍기만 하다.


인생의 놀라운 변화는 그들만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나와 대화를 나눈 선배 역시 마찬가지였다. 10년 전까지 기자로 살던 그는 홍보회사로 이직했다. 몇 년이 지나고 홍보회사 일이 차츰 지루해질 쯤 그는 회사를 다니며 주말에는 로스쿨을 병행했다. 그러다 지난해 변호사 시험에 합격해 그는 현재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50대에 변호사 시험에 합격해 인생의 또 다른 막을 연 그가 대단했다. 변호사가 됐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30대, 40대, 50대에도 끝없이 새로운 곳의 문을 두드리고, 도전하는 그의 삶이 멋지다고 생각했다.


선배는 내게 "고민이 많지"라며 언제든 고민이 있으면 털어놓으라고,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주셨다. 나와 같은 시기를 통과했던 그는 말하지 않아도 지금의 내가 하고 있을 고민들을 이해하고 있는 듯 했다.


그러고 보니 현재 변호사인 선배도, 정치인인 누군가도 인생에서 지난한 시절이 있었다. 그들에게 직접 들은 것은 아니니 그들이 당시 자신의 삶을 어떻게 느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우리는 모두 같은 인간이니까 그들도 나처럼 살면서 적어도 한 번쯤은 생의 권태로움에 허덕였을지 모른다고 막연히 상상해본다. 그럼에도 그들은 매너리즘에 빠지는 일보다는 현재에 충실하며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았고, 인생의 새로운 문을 열 수 있었다.


인생의 어떤 순간은 마치 영원할 것만 같지만, 알다시피 영원한 것은 없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반복되는 일상도 언젠가는 끝이나고, 또다른 삶이 우리를 기다린다. 중요한 건 현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하루를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저 그런 듯 싶지만 사실 인생의 모든 순간들이 결코 그저 그렇지는 않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이다.


내가 삶에서 찍은 무수한 점들이 이어져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될 날은 분명 온다. 내가 가야할 '방향'만 제대로 알고 있다면 늦더라도 언젠가 그곳을 향해 갈 수는 있다. 그러니 불안과 초조함으로 현재의 시간을 낭비하기 보다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매일을 살아가는 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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