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는 상처 지금은 닥ㅊ
여섯 번째 수업을 위해 작가 선생님은 <본인의 상처에 대한 글>을 써오라 했다. 글쓰기 수업을 신청하기 전의 나는 자존감이 바닥을 치고 있었다. 내가 움직이든 않든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고 그만큼 나의 무경력 기간은 길어지고 나이는 많아지고 통장 잔고는 줄어들고... 좋게 흘러가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5회의 수업을 하면서 나에 대해 많이 되돌아볼 수 있었다. 일상 소재의 글을 쓴다고 했으나 그 일상을 채우는 것은 당연히 나였다. 수업 동안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가족이 끼치는 영향, 내가 좋아하는 음식 등의 주제로 글을 썼다. 이번 글도 다른 글을 쓰기 시작할 때처럼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나의 상처... 상처... 내가 어렸을 때 나를 괴롭혔던 것들... 나를 작게 만들었던 것...'. 길지도 짧지도 않은 어린 시절 회상을 끝마치니 어렵지 않게 한 장의 글이 완성되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있었는데 밖에서 친구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장 친했고 너의 베스트 프렌드 아이릿/J라고 삐뚤빼뚤 편지 끝에 적어 편지를 주고받았던 그 친구의 목소리. 친구 목소리를 듣고 기쁜 마음에 나가려고 잠금쇠를 풀려는 순간 "나 아이릿 별로야. 놀아주는 것도 지쳐. 그냥 놀아주는 거지."라는J의 목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이어지는 말도 내 생김새와 옷차림에 대한 비난이었다. 그 뒤로 나는 그 친구랑 평소와 같이 지내면서도 그때 뛰쳐나가서 소리라도 질렀으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하는 상상을 했다. 원래도 내향적이면서 소심했던 나는 그 일을 계기로 조금 더 눈에 띄지 않으려 노력했던 것 같다.
중학생 때는 서울에서 지방 도시로 이사를 갔다. 장남인 아빠가 할머니 모시고 살기 위함이었다. 내향적인 나를 새로운 환경에 밀어 넣은 할머니를 욕했다. 소극적인 성격과는 별개로 '왈가닥'이라고 불리던 나였다. 긴 머리를 곱게 빗어 꾸미기보단 그냥 풀어헤치거나 하나로 질끈 묶고 운동복을 입고 여기저기 뛰어다녔다. 어렸을 때부터 인형놀이 대신 칼싸움이나 온라인 게임을 하던 나였다. 치마보다 바지가 좋았고, 애교, 조용함, 정숙. 이 모든 것은 나와 거리가 있는 단어였다.
나는 고등학생 때도 할머니가 지향하는 여성상과 가까워지지 않았다. 그래서 할머니는 나를 자주 타이르곤 했다. "그렇게 행동하면 안 된다. 할머니가 오랜만에 오면 살갑게 와서 인사도 하고 애교도 부려야지. 치마를 입었으면 다리도 모아서 앉아야지. 요리도 잘하고 집안일도 네가 나서서 하고. 저기 네 친척동생 좀 봐라 얼마나 이뻐(조용하기도 했고 항상 치마에 구두를 신던 동생이었다). 이쁘게 입고 꾸며야 남자들이 좋아하지."
그 말에 내가 하는 답은 한결같이 영혼 없는 "네."였다. 엄마, 아빠가 그렇게 시키기도 했고, "네"라고 함으로써 그 뒤의 잔소리를 피할 수 있었다.
대답과는 별개의 행동을 하긴 했다. 나를 부정당해 상처 받은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의 반항이었다. 할머니가 오시면 이 전의 타이름은 잊은 듯 한결같이 "오셨어요." 목례를 하고 자리를 뜨기 일쑤였다. "할모니 왔오~~!?"하며 뛰쳐나가는 동생들을 보며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다가 또 한소리를 들었다. 치마를 입으면 조심해야 하니 치마는 일절 구매하지 않았다. 교복도 치마 대신 바지를 따로 구매해 입었다. 요리를 잘해야 한다며 음식 손질을 시키면 맛있는 부분은 칼질에 서툴다는 표시로 다 날려버리고 상하게 만들었다. 설거지를 시키면 접시를 부딪히며 시끄럽게 하고, 실수로 깨 버렸다. 조신과는 거리가 먼 취미를 보여주며 RPG(롤플레잉 게임, Role Playing Game)을 하며 총과 화살을 쏘며 적을 죽였다. 나는 그렇게 원래의 나보다 더 왈가닥이 되어갔다.
글을 쓰고 나니 내가 약해서 그 모든 말에 휘둘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만 12살짜리가 나보다 훨씬 어른인 사람들에게 자주 듣는 말을 넘길 수 있는 강한 마음을 가지는 일이 쉽지는 않다. 주변에선 '여자답지' 않은 나를 타일렀지만 그게 나였고 바뀔 수 없는 거였다. 내 마음 가는 대로만 사는 게 가능하진 않지만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바꾸라고 강요하는 것 역시 옳지 않다. 그때는 그런 말에 상처 받아 악에 받쳐 더 엇나갔다. 지금은 그 덕분에 강해졌다. 누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며 무언가를 강요하면 '뭐래.'하고 넘길 수 있게 되었다. 한 때는 상처였을지라도 지금은 흉만 남았다. 후벼 파도 더 이상 아프진 않다. 이건 할머니 덕분이다.
글쓰기 수업 6주 차.
저마다의 상처가 있었다. 학생들은 저마다의 상처를 글로 적어왔고, 그 글을 모두 앞에서 읽으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자신보다 훨씬 작고 여린 상대에게 짧게는 수년, 길게는 수십 년이 지나도 감정의 동요를 일으키는 상대방은 자신의 행동이 잘못됐었다는 것을 지금은 알까? 우리 모두 상처를 꺼내보였고 이젠 그 상처가 별거 아님을 안다. 과거엔 별 거였겠지만 지금은 간지럼만 일으킬 뿐. 상처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그 일에 정리가 되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 같다.
나는 할머니에게 상처 받았지만 한편으론 할머니 역시 피해자였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누군가 할머니에게 쭉 주입했을 '여자니까, 여자라서...'와 같은 문장들. 너무나 당연해서 손녀에게도 말했을 그 문장들. 나는 그때 삐뚤어진 행동으로 할머니의 성질을 긁었지만(사실 지금도 그러고 있다) 약간의 후회는 한다. 그때 거부했던 모든 것들로 인해 지금의 성격이 만들어진 것 같아서. 지금의 내 성격이 불완전하던 어렸던 나의 과오로 빚어진 게 아닌가 해서.
앞으로는 온전한 나의 마음이 이끄는 대로 선택하는 삶을 살고 싶은데 쉽지 않을 것 같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