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번째 수업에서는 가족이 내게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글을 썼다. 가족이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지,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는지 생각해보았다. 꽤 오래 생각했다. 오랜 생각 끝 아빠에 대한 글을 쓰기로 했다. 아빠는 나와 동생에 대한 믿음이 큰 편이다.아빠는 줄 수 있는 사랑 그 이상을 주려 한다. 더 줄 수 없어 우리에게 미안해하면서까지.우리는 그런 아빠에게 "충분해, 아빠. 왜 그렇게 미안해해!!" 소리치지만, 우리도 그처럼 잘해주고 싶은데 그렇지 못해서 낙담한다. 결국 우리는 서로에게 더 주지 못해 힘들어한다. (엄마는 그냥 서로 알아서 잘 살면 된다는 편이라 차라리 엄마를 생각하면 아빠를 생각할 때보다 마음이 편하다.)
그 때문에 집을 벗어나고 싶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그 믿음이 부담스러워서 전공 살려 프랑스로 어학연수를 가겠다는 핑계로 집을 떠날 준비를 했다. 학교를 다니며 아르바이트를 두 개씩 했지만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 전혀 고되지 않았다. 1년 조금 넘게 일을 해서 1500만 원 정도를 모았다. 프랑스 어학연수를 위해 통장 잔고 증명에 필요한 돈은 1100만 원이었다. 이 돈을 모은 내가 기특해서 스스로에게 선물을 준다며 동남아 여행을 다녀오고 나니 1100만 원 정도가 남았다. 그 뒤로 어학연수 준비를 차근차근해나갔다. 설렜지만 마음 한 켠에 선 '진짜 이래도 되나? 잘할 수 있을까?"싶었는지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집을 나가려 한 거지?" 하며 엉엉 울었다. 출국 전날까지 울어 퉁퉁 부은 눈으로 기쁨과 슬픔 두 감정을 품고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파리행 비행기에 오를 때까지도 아무 생각이 없었지만 파리 샤를 드 골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Bienvenue à Pairs> (파리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가 적힌 현수막을 보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자유다."
첫 두 달은 좋았다. 한국인 친구뿐 아니라 터키, 브라질, 멕시코, 태국, 캐나다, 미국, 노르웨이 등 여러 국가에서 온 친구들을 만나 (조금) 공부하고 (많이) 놀았다.낮에는 쇼핑을 하고 프랑스 치즈와 와인을 종류별로 맛보며 야외활동 수업을 들었고, 밤에는 수아레(soirée, 밤에 모여서 노는 파티)에 가서 놀았다. 프랑스에선 내가 뭘 하든 관심이 전혀 없다는 점이 너무 좋았다. 아무 데나 앉아서 바게트 샌드위치를 먹고, 아무렇게나 주워 입고 입고 돌아다녀도 그 누구 하나 눈길을 주지 않았다. 수업은 언제나 토론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한국에선 대학교 강의 중 질문을 했다가 수강생들에게 눈초리를 받기 일쑤라 소심하게 참았는데 여기선 그 반대였다. 수업에 참여하지 않으면 소극적이고 자기주장 못하는 아시안 여성으로 비칠 뿐이었다.수업도 생활도 너무 만족스러웠다. 남의 시선을 받지 않는다니. 부모님의 기대에서도 벗어났다니!
물론즐거운 날만 계속된 건 아니다. 어학연수 도시를 지방의 소도시로 가서일까. 혼자 산책을 할 때면 '칭챙총', '고니치와', '니하오'와 같은 동양인을 조롱하는 말을 매일같이 들었다. 장을 보러 마트를 가면 마그레브(Maghreb 북아프리카에 위치한 나라 출신의 사람들) 출신 아이들의 놀림거리가 되었다. 빵집에서 발음이 안된다는 이유로 내가 원하는 빵을 사지도 못하고 빈손으로 나온 적도 있고, 하루 뜨거운 밤을 보내보자며 귀에 바람을 부는 변태들도 만났다. 이런 스트레스 지수는 해방감 지수를 넘어선 적이 없다. 하지만 목숨의 위협을 받을 일이 생기니 달라졌다.
프랑스 생활 석 달 차, 목숨에 위협을 받게 될 사건으로 대도시로 이사를 결심했다. 한국에서도 혼자 이사를 한 적이 없는데 프랑스에서 이사라니. 편하게 이사를 가려고 한 회사의 택배 서비스를 이용했다. 며칠 내 도착한다는 말만 믿고 캐리어 하나만 들고 이사한 동네로 갔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내 캐리어가 오질 않았다.대부분의 물건은 다 거기 있는데! 회사에 문의를 하니 나와 같은 서비스를 이용한 다른 사람이 사는 동네로 배송됐다더라. 당연히 회사의 과실이니 그들에게 처리를 해달라 했다. 난 서류를 옳게 작성했으니 당연히 보내주겠거니 했지만 프랑스에선 '당연한 것'이 없었다. 그 문제로 며칠간 콜센터에 전화를 해서 다퉜고, 편지도 서 너 통이나 보냈건만 내게 날아온 것은 유료 콜센터 휴대폰 청구서뿐이었다. 프랑스인들이 도와줘도 해결이 되지를 않았다.
극심한 스트레스로 지쳤던 어느 날 아빠와 통화를 하다 오열을 했다. 아빠는 "우리 딸 잘할 거라고 믿는다. 그래도 힘들면 언제든지 돌아오라"라고 했다. 그 말에 무너졌던 정신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아빠가 내게 주는 믿음이 무거워 벗어났는데 그 덕에 일어설 수 있었다. 아빠의 넘치는 믿음과 사랑을 나를 가두는 동시에 보호해줬다. 참 아이러니하다.
글쓰기 수업 5주 차
아빠의 믿음이 나를 가둬둠과 동시에 나를 보호해주는 울타리라고 글을 써서 제출했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가정을 꾸린 분들은 자식에 대한 글을 쓰고 긍정적인 영향을 받는다는 글이 다수였고, 혼자인 사람들에게선 여러 가지 내용이 나왔다.
글을 쓸 때는 아빠의 믿음이 나를 옭아매는 것 같았는데 완성을 한 글을 읽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문제는 나였던 것 같다. 아빠나 엄마가 원하는 모양의 믿음만을 줄 생각을 한 내가 어리석었다. 나는 다른 식으로 보여줄 수 있는 사람임을 나 스스로가 증명하지 못한 셈이다. 그걸 할 자신이 없어서 프랑스로 도망갔던 거고. 부모님의 기대를 메마르게 할 생각으로 백수 생활을 이어가고 있나? 싶기도 하다. 내 용기가 부족했던 것인데 애꿎은 아빠 탓만 했다. 가장 큰 피해를 보았고, 볼 사람이 나인 것도 모르고. 엉망진창으로 제출한 과제 덕에 이렇게 또 자기반성을 한다. 내 선택이었다, 모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