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는 못했습니다
요르단 생활 한 달가량 되었을 즈음 회사에서 암만 구시가지에 있는 영국 문화원이 영어 공부하기 괜찮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두세 번 정도 추천받고 나니 영국문화원에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국내보다는 해외가 영어 공부하기 좋은 환경이라 생각해서 학원에 다녀볼 생각이 있었던지라 학원 위치만 확인하고 퇴근 후 곧바로 학원으로 갔다. 이럴 수가. 우리나라처럼 학원에서 간단한 시험 보고 반배정 후 바로 수업을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택시비까지 쓰고, 짐 검사까지 하고 겨우 어학원 건물에 들어갔건만 무작정 학원을 찾아가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학원 담당자는 온라인으로 영어 시험을 본 뒤, 15JD를 지불하고 현장 레벨 진단 시험도 예약해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그 말인 즉 지금은 아무것도 해줄 수 없으니 시험 예약 후 다시 방문하라는 뜻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당일 시험은 불가능한지 확인하고 불가능하다는 말에 왕복 택시비와 시간을 허비한 채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것뿐이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구글에 영국 문화원(British council)을 검색 후 레벨 진단 시험을 예약했다. 레벨 테스트를 돈 내고 받으려니 좀 아까웠지만 약간의 투자는 공부 의지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하니 지불해야지.
두 번의 실수는 없다. 이번에는 문법 문제가 대부분이었던 온라인 1차 시험도 이행했고, 메일로 요청 사항까지 미리 보냈다. 내 요청사항은 비즈니스 수업 수강과 읽기, 쓰기, 듣기, 말하기를 종합적으로 공부하고 싶은 것뿐이었다. 방문 예약도 잘 되었고, 요청 사항에 대한 메일에 대한 답도 잘 받았다. 다시 예약 당일. 마찬가지로 가방 검사를 마치고 영국 문화원 건물로 들어갔다. 레벨 진단 시험은 10분 정도 진행되었던 것 같다. 간단한 자기소개와 영어 공부 목적 그리고 간단한 질문에 답하기. 내가 들어갈 반까지 바로 배정받았다. 가장 높은 반에 배정되었다. 외국어는 자신감과 약간의 뻔뻔함이라는 내 태도가 먹힌 것인가. 진단 시험이 끝나고 선생님께 한 번 더 요청했다. "저는 비즈니스 영어와 듣기, 읽기, 쓰기, 말하기를 포괄적으로 배우고 싶어요." 선생님은 반 배정 후 원하는 반(듣기/읽기/쓰기/말하기/다양한 주제)에 들어가면 된다고 하며 응원해 주었다.
영국 문화원 수업을 신청하기 위해서는 앱을 설치해야 한다. 앱 설치 후 로그인을 하면 내가 속한 등급에 해당하는 오전, 오후 수업 반을 신청할 수 있다. 주제는 과학, 사회, 문화 등으로 다양했다. 주제도 다양했고, 영국 정부의 수업 방식을 따른다고 하여 첫 수업 날이 기대되었다.
대망의 첫 수업 당일. 퇴근 후 곧장 택시를 타고 영국 문화원으로 갔다. 준비물은 필기구와 노트 또는 태블릿 PC. 수업 전 발송 된 메일함에서 수업 자료를 다운로드하여 예습을 할 수 있었다. 별도의 유인물은 제공되지 않았다. 첫날은 개발을 주제로 진행되는 수업이었다. 선생님은 간단한 자기소개 후, 수업에 신청했던 수강생들도 자기소개해줄 것을 권했다. 대학생과 직장인이 골고루 섞여 있었다. 대부분 엔지니어나 IT 관련 종사자였고 영어 공부를 위해 영국 문화원에 오게 되었다고 했다. 짧은 자기소개 후 선생님은 학생들을 5-6개 조로 나눈 후 본 수업이 시작했다. 그런데 이 교실 너무 부산스럽다. 앞에서는 의학 발전을 위해 동물 실험을 이어가는 것이 옳은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는데 내가 속한 조에선 본인 직장 얘기와 내 출신지에 대한 질문뿐이었다. "선생님이 우리 쳐다보는데, 수업에 집중해요."라고 얘기해 봤지만 "저 집중하고 있어요~ 계속하세요!"라더니 바로 "그래서 왜 요르단에 왔어요?" 하고 물으며 수업 대신 나에게 집중했다.
1시간가량의 첫 수업이 끝났다. 토론식 수업으로 의견을 나누는 게 재미있었으나 자기 얘기만 하는 학생들 때문에 집중을 배로 해야해서 지쳤다. 어떻게 첫술에 누가 배부르랴. 학원 앱에 흥미로운 주제가 보이면 바로 수업에 신청 해 퇴근 후 곧바로 학원으로 향했다. 환경과 인권에 대한 수업도 들었는데 전부 첫날 수업처럼 정신이 없었다. 선생님은 수업을 방해하는 학생들을 제지하지 못했다. 게다가 듣기, 읽기, 쓰기, 말하기를 포괄적으로 수업이라더니 듣기와 말하기에 치중되었다. 비즈니스 영어도 진행된다는 얘길 들었지만 비즈니스 영어반도, 읽기와 쓰기 반도 열리지 않았다.
이런 저런 이유로 스무 번의 수업 중 다섯 번만 듣고 한 달 전엔 수업을 듣고 싶어 찾아갔던 안내데스크에서 환불을 요청했다. 환불 과정은 생각보다 까다로웠다(학원 규정에 따르면 환불은 불가능하다). 규정에 어긋나는 일을 하기 위해서 기승전결을 갖춰 깔끔하게 메일을 적어서 보냈다. 3일 이내 온다던 답은 몇 주가 지나도 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유선 문의로 상담사와 연결이 되면 다시 이메일 접수 번호를 확인, 자기는 담당자가 아니라 모른다는 답변만 돌아온다. 잊고 지내다 문득 떠올라 메일을 또 보냈다. 환불 못 받으면 아쉬운 사람은 나이기 때문에 '환불 언제 돼요?'보다는 '환불 진행 과정이 궁금합니다'라고 보냈다. 그리고 첫 문의 후 약 한 달이 지나서 '환불 처리가 무사히 되었으니 학원에 방문하여 수표를 찾아가세요.'라는 메일을 받았다. '현금으로 지불했는데 무슨 수표지?'라며 의문을 품고 다시 택시를 타고 학원으로 갔다.
정말 수표(cheque)로 환불을 받았다. 어떻게 이 종이쪼가리를 현금으로 어떻게 받을 수 있는지 물으니 스탠다드차타드 아랍뱅크 등에 설치된 ATM기 수표 처리기 넣으라 한다. 그럼 며칠 내 내가 제출했던 은행 계좌로 입금된다고. 현금으로 지불했으니 그대로 현금으로 환불해 주면 안 되나 싶었지만 절차를 따라야지. 약 한 달 만에 돌려받은 소중한 환불 금액(수표)을 들고 이번에는 은행으로 갔다. 정말 ATM기에 수표 처리기기가 있었다. 수표를 넣고 숫자 몇 개 치니 작업 완료. 며칠 뒤 통장에 환불금액이 입금되었다. 학원에 가서 공부하는 데 쓴 에너지보다, 환불 문의 하는데 더 많은 에너지를 쓰지 않았나 싶다. 요르단 암만에서 영어를 배우려던 나의 꿈은 이렇게 끝이 났다. 아랍어나 배워야지.
(추신) 혹 내 글을 읽고도 영국문화원에 등록할 의향이 남아 있다면 이 점 꼭 알고 가시라. 학생들 방학 기간에는 수업이 적고, 오전 오후 수업은 3-4개밖에 열리지 않는다. 선생님의 역량에 따라 수업 진행이 달라지지만 내가 만났던 네 명의 선생님의 대처는 유사했다. '너는 놀려면 놀아라, 나는 수업을 이어나갈 테니.'. 학원비를 현금으로 지불했어도 환불은 수표로 내준다. 환불받는 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리니 잃어버릴 때 즈음 돈이 생긴다고 생각하면 편할 듯. 또한 타당한 이유로 무례하지 않게 이메일을 보내야 한다. 학원 절차대로라면 환불이 불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