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도시 페트라(Petra)를 떠나 와디럼(Wadi Rum)으로 이동했다. 페트라에서 숙박을 하고 이틀 연속 페트라 정상을 찍는 사람들도 있지만 우리 여행의 주제는 '쉼'이다. 페트라는 정말 가볍게 훑고 와디럼 숙소에서 별 보면서 자고, 한 번쯤은 해보고 싶었던 사막 지프투어도 신청할 예정이다. 친구 S에게 추천받고 간 숙소였기 때문에 와디럼을 향해 가는 차 안의 우리는 숙소에 어떤 의심도 품지 않았다.
페트라에 가면서도 느낀 거지만 요르단 남부의 고속도로 양 옆에는 있는 것이 거의 없다. 간혹 주유소와 그 옆에 딸린 슈퍼마트, 작은 집은 보이지만 탁 트였다. 작은 집이라도 보이면 '저런 집에 물은 공급되는 건가? 근처에 아무것도 없는데 뭘 하지?'라며 속으로 무한 질문을 했다. 속에 담아두려다 입 밖으로 튀어나간 궁금증도 있었던 것 같다. 친구가 옆에서 "그러게."라며 답해줬다.
영화 <매드맥스>*에서 보았던 것 같은 황폐해진 풍경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지구가 아닌 다른 행성에 온 것 같기도 했다. 살아있는 식물인지, 메말라 죽어 버린 식물인지 모를 갈색 덩어리는 굴러다니지, 주거지는 보이지 않지. 적막한 도로를 달리다 그대로 잠들었다.
*핵전쟁으로 멸망한 22세기, 물도 자연도 다 없어져 황폐해진 곳이 배경인 영화.
잠을 자다 깨도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얼마나 달린 건지 가늠도 가지 않을 정도로 창밖에는 처음과 똑같은 풍경만 지나가고 있었다. 조금 달라진 것이 있다면 아까는 멀리 있다고 느껴진 거대한 민둥산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뿐.
전기차를 타고 이동했는데 도로가 깔리지 않은 사막에 위치한 캠프에 가기 위해 중간에 다른 차로 옮겨 탔다. 와디럼에서 출발한 지 100분 정도 지나서 와디럼에 위치한 베두인 캠프에 도착했다. 페트라에서도 그랬지만 와디럼 또한 베두인(Bedouin)이 장악 아닌 장악을 하고 있었다. 요르단 친구한테 페트라에 있는 베두인은 진짜 베두인이 아니라는 말도 들었는데 어떤 말이 사실인지 모르겠다. 확실한 건 두 지역 베두인의 소속 부족은 다른 듯했다. 가서 보면 알겠지만 생김새와 복장에서 차이가 있다. 와디럼의 베두인은 척박한 사막에 자리를 잡고 캠프, 지프 투어 등을 운영하며 베두인 전통문화를 관광객에게 전승하며 유지하며 살아간다.
캠프에 도착해서 짐을 풀고 잠시 쉬고 있는데 직원이 다가왔다.
"부킹닷컴 통해서 예약한 Iris 맞나요?"
"네."
"그거 무료로 취소 가능하게 해 줄 테니 취소해 줄 수 있어요?"
"무슨 이유로요?"
"그 사이트를 이용하면 저희가 수수료를 많이 내서요. 안될까요?"
수수료까지 운운하면서 부탁하는데 매정하게 거절할 수 없어 부킹닷컴으로 예약해 둔 것을 취소했다. 직원은 고맙다며 하루 잘 보내라는 말을 덧붙이고 떠났다.
베두인 캠프라 하더라도 관광객에게는 호화로운 만찬이 필요한 법. 와디럼에 가면 베두인 캠프에서 먹을 수 있는 잘브(Zarb)를 먹어야 한다. 잘브는 땅에 큰 구덩이를 판 다음 숯을 넣고, 거기에 고기와 채소 등을 얹어 천천히 익히는 대표적인 베두인 음식이다. 캠프 예약할 때 저녁은 잘브가 제공된다고 해서 간 거였다. 친구랑 잘브 먹을 생각에 들떠있었는데 바람이 불어서 요리가 불가능했다니. 수십 개의 텐트를 갖추고 있는 캠프에서 그런 시설 하나 갖추지 못했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았다. (나중에 친구 S에게 들으니 잘브는 바람이 불어도 할 수 있는 요리라고 한다.) 내가 와디럼에 매일 올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 전통음식인 잘브가 없다니! 이날 방문객이 10명 정도라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했다. 캠프 직원이 다가와 "저녁 맛없으면 저녁비 안 내도 돼요."라고 했지만 페트라에서부터 간식 말고는 먹은 게 없는 우리한테 맛이 없을 리가.
잘브가 없어서 아쉬웠지만 사막에서 먹는 저녁은 꽤 괜찮았다. 12JD라는 저녁식사요금은 터무니없이 비싸다고 여겨지긴 했지만 사막에서 식재료 조달하는 것이 쉽지 않을 테니 사치스러운 저녁이다. 저녁식사로 꼬투리를 잡기에는 첫 번째 접시 싹 비운 데다가 "전통식 없는 거 뭐야.. 근데 이거 은근히 맛있다. (우걱우걱) 더 갖고 와야겠다."하며 한 번 더 가져다 먹기까지 했다. 당연히 맛없어서 돈 못 내겠다는 말대신 잘 먹었다는 말을 하고 열쇠를 받아 텐트로 가서 쉬었다. 생각보다 열악한 텐트에 누워 부킹닷컴에 후기 남길 기회를 날려 버린 것을 아주 잠시 후회했다.
페트라에 가겠다고 아침 일찍 일어난 탓에 더 늘어져 있고 싶었지만 차 마시는 시간이 있어 다시 나왔다. 문을 열자마자 언제 뜨거웠냐는 듯 차갑게 식은 사막 바람이 불었다. 피부에 닿는 공기가 차가워 미리 챙겨 온 플리스를 챙겨 입고 다시 식당 앞 쉼터로 갔다. 오늘 하루 캠프에서 같이 지낼 사람들은 부지런한 건지, 저녁 먹은 뒤 그대로 앉아있던 건지 다들 먼저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자리에 앉으니 베두인이 다가와 뜨거운 차를 내주었다. 요르단에서 식후 차는 우리나라 볶음밥에 가깝다. 현지인 친구 집에서도 밥 먹고 차 안 마시고 간다고 하면 서운해한다. 베두인이 내준 차는 암만에서도 매번 마시던 블랙티였다. 암만에서는 민트와 설탕을 곁들였는데 베두인이 준 차는 그냥 블랙티였다.
이렇게 모아두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했는데 배스킨라빈슨 31 게임을 했다. 사회자는 3판의 게임을 다 이겼는데 나중에 게임에서 승리하는 법도 수학적인 이유를 들며 알려줬다. 뒤이어 우리를 힘들게 하는 시간이 다가왔다. 캠프 내 모든 직원이 숙박객 옆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지프투어 흥정을 시작했다. 현지인 친구들한테 들어 대략적인 가격을 알고 있는 데다가 정찰제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이거 다른 사람들한테는 못 주는 가격인데 멀리서 왔으니까 해줄게요. 셋이 xxJD. 다른 사람들한테는 얘기하지 말고요. 어때요?" 우리 쪽에 배정된 베두인이 우리한테만 들리도록 속삭였다.
터무니없이 비싼 값이었다. 우리가 가고 싶다던 사막에 있는 다리는 5시간 투어로 갈 수 있다며 더 비싼 투어를 제안한다. 인터넷 검색을 하고 싶었지만 숙소 시설에 포함되어 있던 '와이파이'는 어느샌가 끊어져있었다. 대신 나는 역으로 "우리도 다른 사람한테 얘기 안 할 테니까 이 가격에 해줘요. 친구 S가 이렇다고 하던데요?" 했지만 택도 없었다. 지프투어를 못해서 아쉬운 건 그들이 아니라 우리였다. 팽팽한 줄다리기가 아니라 다른 한쪽이 줄을 언제 놓아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 즐겁게 여행을 하러 온 거지 흥정 때문에 힘 빼기 싫은 내가 먼저 백기를 들었다. "좋아요 대신 방금 얘기한 대로 저희 셋만 타는 걸로 XXJD인 거예요."하고 3시간 프라이빗 지프 투어를 예약했다.
한국에서 15시간 넘는 시간 비행기를 타고 하고 온 데다가 꽉 찬 일정을 소화하던 친구들은 몸상태가 좋지 않았다. 다들 내일을 위해 짧게 별을 보고 텐트로 돌아갔다. 나는 혼자 남아 별을 보았다. 캠프에서 시작부터 삐걱거렸지만 어차피 우리의 목적은 와디럼에서 별 보기였는데 달성했다. 대기오염과 도시의 빛으로 인해 안 보이던 별을 잔뜩 보았다. 게다가 별똥별도 두세 개 보았다. 처음에 하나 떨어지길래 잘못 본 건가 싶었는데 뒤이어 더 떨어졌다. 우주를 떠돌다 지구 대기권에서 들어와 불타 버린 운석이 내 눈엔 그저 소원을 빌고 싶은 신기한 자연 현상.
만약 와디럼에서 더 많은 별을 보고 싶다면 보름달이 뜨는 날은 피해서 방문하는 것을 추천한다. 내가 간 날은 둥근 보름달이 아주 이쁘게 떠서 하늘이 환했다. 보름달이 아닌 날 가면 더 많은 별과 별똥별을 관찰할 수 있다고 한다.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캠프 규모도 작은 곳이 좋다고 한다. 내가 간 캠프는 아주 환한 편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좋은 숙소는 넓고 조명이 있다.
다음 날 지프투어를 떠나기 전 아침을 가볍게 먹고 숙박비, 저녁식사값, 지프투어비를 지불했다. 돈을 주기 전 다시 한번 "이게 최종 할인가인 거죠? 더 안 되죠?" 질척여봤는데 고개를 가로젓는다. 바로 돈을 주고 정산을 끝냈다. 출발 시간이 되었는데도 나서자는 직원이 없어 사진을 찍으며 시간을 보냈다. 어제 봤던 직원과 다른 직원이 와서 "이제 투어 하러 갈까요? 3시간 맞죠?"묻는다. "네 프라이빗 투어 3시간이요."하고 따라나서 차 옆에 서있는데 한 커플이 다가온다. '다른 차 타겠지'생각했는데 차량 기사 겸 가이드가 물 한 상자를 들고 오며 차에 타라고 한다.
"저희 셋이서만 3시간 투어 한다고 얘기 됐는데 (저 둘도) 같이 가는 건가요?" 하고 물었다.
"저는 모릅니다. 다섯 명이라고 들었어요." 기사는 간단한 영단어로 설명했다.
"아뇨, 저희는 셋이서 지프투어 하는 값을 지불했어요."하고 되물었지만 직원은 어깨만 으쓱한다.
급히 아침에 돈을 지불했던 사무실로 달려가 눈에 보이는 직원한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저는 직원이라 몰라요. 어제 그 사람은 지금 다른 캠프에 있어요. 그리고 이제 차 한 대밖에 없어서 지금 못 가면 못 가요."라며 이 상황을 네가 어찌할 수 없다며 쐐기를 박는다.
다시 지프차로 돌아가 친구들한테 설명했고, 기사는 차에 시동을 걸었다. 3시간 지프투어의 시작이었다. 어제 캠프 도착 하자마자 예약 취소 요청받았던 상황이 겹쳐 보였다. 거칠게 사막을 달리는 지프에 앉아 셰마그(Shemagh)*와 선글라스로도 막아지지 않는 모래 바람을 맞으며 '어쩔 거야 지프투어 즐겨야지.' 생각했다.
*케피예(Keffiyeh)라고도 불리며 아랍계 남성들이 두르는 빨간색 격자무늬 천이다. 첫날 암만 시장 여행하면서 샀다. 두 장에 5JD에 준다 해서 바로 구매했다.
지프타를 타고 사막을 달리는 기분은 짜릿했다. 근방에 있는 캠프에서 머무는 관광객도 하나같이 지프차를 타고 달리고 있었는데 경쟁하는 것 같기도 하고 이게 바로 매드맥스지하며 즐겼다. 차에 타기 전 꽉 묶여있던 스카프는 진작 풀려서 펄럭였다. 처음에 도착한 곳은 모래언덕. 신발을 벗고 햇볕에 뜨거워진 모래를 밟았다. 몇 년 전 계족산에서 맨발로 황토를 밟으며 걸은 기억이 떠올랐다. 고운 모래로 발이 푹푹 빠져 생각보다 언덕 정상에 오르기는 쉽지 않았다. 정상에 올라 다른 관광객들이랑 서로 사진을 찍어줬는데 아시아에서 온 사람이 없어서 아쉬움이 남았다. 역시 사진은...
3시간 이내 돌아야 하는 곳이 정해져 있어 빠르게 움직였다. 낙타가 많이 있던 장소에 도착해 기사한테 이곳에 대한 설명을 부탁했는데 소통이 안되었다. 아쉬운 마음에 우리끼리 움직였는데 영어, 스페인어를 쓰는 단체 관광객이 가이드를 대동하고 왔다! 그 옆에서 귀동냥을 했다. 수만 년 전에 사막의 나침반 역할을 하던 벽화였다. 와디럼 곳곳에는 이런 벽화가 다수 있다고 한다. 사막을 건너던 사람들의 지혜가 느껴졌다.
차를 반강제로 한 잔 마시고 다시 지프차에 올랐다. 붉은 모래와 암석도 보이고 특이한 모양의 암석, 1998년에 개봉한 <아라비아 로렌스> 촬영지도 갔다. 한국이나 다른 유럽이, 아시아 여행지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마지막으로는 더 긴 투어를 해야만 갈 수 있다던 거대 암석으로 만들어진 다리까지 갔다.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데 돌에서 고약한 냄새가 나서 숨을 참았다. 냄새에 머리가 띵했는데 사진 찍으러 가야 하는 곳, 높이도 높이지만 생각보다 폭도 좁다. 다리가 덜덜 떨렸다. 친구가 손을 잡아 주지 않았더라면 두 다리가 아니라 손까지 써서 기어갔을 것이다. 얼굴은 안 보이지만 기념사진은 잘 남겼다.
5시간이 아닌 3시간 투어를 예약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5시간짜리를 했더라면 엉덩이가 납작해졌을 거다. 현지인 친구는 2시간이면 충분하다고 했다. 다음에 갈 기회가 있다면 2시간짜리를 할 듯하다. 특이한 바위, 고대 유적지도 봤만 차 마시며 기념품 판매하는 곳도 3곳이나 들렀다. 막판에는 시간이 부족하다며 액셀을 밟았고, 서둘러 사진을 찍으라며 "사진 사진!(Picture, there!)"을 외쳤다.
같이 차 타고 다니던 커플과 서로 사진을 찍어주며 짧은 자기소개 시간도 가졌다. 투어 시작하고 얼미 지나지 않아 조심스레 "혹시 이거 프라이빗 투어라고 하지 않았어요?" 하니 멋쩍게 웃으며 "그랬어요."라 한다. 이 베두인 아저씨들 몇 명한테 사기를 친 거야. 어쩐지 우리가 지프차 앞에 서있으니까 의아해하며 처다보더라니. 프라이빗 투어의 의미가 무색했던 와디럼 지프투어였다. 만약 와디럼에 갈 계획이 있다면 투어가 정찰제로 운영되는 곳으로 가자. 보름달이 안 뜨는 날인 데다가 시설은 좋되 덜 밝은 곳이면 금상첨화. 잘브를 맛볼 수 있는 곳이면 더 좋다.
별빛 샤워했던 밤, 사막에 지어진 텐트에서의 하룻밤, 지프차 사막투어가 떠오르는 와디럼 여행도 이렇게 끝을 맺었다. 이제 우리는 요르단 유일의 항구도시 아카바(Aqaba)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