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째 날은 고속버스를 타고 남부로 이동했다. 요르단의 대중교통 중 아랍어를 못하는 외국인이 이용하기 좋은 것은 암만 시내 광역버스와 페트라와 아카바 등으로 가는 노선을 제공하는 제트버스(JETT) 뿐이다. 암만 7 서클이나 압달리점에서 페트라로 가능 버스는 미리 예약해 뒀다. 예약 시 아이디(ID)를 적으라는 칸에 무심코 별명을 적었는데 나중에 다른 친구 예약 도와주면서 여권 번호를 적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이디로 아이릿이라고 적었지만 문제없이 이메일로 온라인 표를 받을 수 있었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 Iris라고 적었다.
페트라행 제트버스는 7 서클과 압달리 지점에서 탈 수 있는데 하루에 딱 1회 운행한다. 그것도 우리에겐 다소 이른 새벽 6시 30분에. 전날 3박 4일 치 짐을 싸두었고 아침에는 짐만 챙겨서 우버를 탔다. 한국에서도 6시 30분에 길을 나선 적이 거의 없는데 암만의 새벽이라니. 차량이 거의 없어서 그런지 공기는 좋았지만 역시 새벽에는 조금 서늘했다.
팔레스타인이 없는 지구본
6시 30분에 출발하기로 한 버스는 10분 늦게 출발했다. 늦게 오는 사람들까지 다 기다리고 태워주는 것 같았다. 압달리에서 출발한 버스는 7 서클을 들러 나머지 승객을 태우고 페트라로 향했다. 구글 지도와 버스 공식 홈페이지에서는 암만에서 페트라까지는 3시간 정도 소요된다고 나왔다. 늦게 출발했지만 휴게소 방문 시간까지 포함해서 적어둔 거라 생각했다.
아니었다. 우리가 탄 버스는 페트라로 가는 도중 휴게소에 들렀고 화장실에 가거나 기념품 가게도 구경할 시간을 줬다. 무려 20분이나. 한국의 휴게소처럼 먹거리가 다양한 건 아니었지만 슈퍼에서 물이나 간식 정도 사기 좋았다. 하지만 20분이나 있을 일을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휴게소에서 시간을 보내느니 빨리 도착해서 페트라를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했지만 내 마음대로 되는 건 없다. 요르단 사람들은 생각보다 여유롭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프랑스에서 느린 행정 처리에 적응된 줄 알았지만 버스가 늦게 출발하고, 휴게소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는 건 또 다른 문제다. 그래도 어쩌겠나. 이것이 여행의 묘미라며 휴게소 건물 밖에 앉아 '대체 언제 출발하니. 기사님 커피 언제 다 드시나요.' 하는 생각을 하며 거침없이 달리는 화물차를 바라보았다.마침내 10시쯤 페트라 주차장에 도착했다. 10분 늦게 출발하고, 7서클에서 승객 태우고, 휴게소에서 20분 쉬니 10시다.
페트라는 요르단의 대표 관광지인데 요르단 여행 간다면 이곳을 오기 위해서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유명하다. 나마저도 요르단이 어디 있는지는 몰랐지만 페트라가 요르단에 있다는 건 알았다.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이기도 하고,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세계 10대 미스터리에도 요르단의 페트라가 포함되어 있으니. 학생 때는 저 10대 미스터리 건축물을 다 보는 것이 꿈이었다.
페트라는 요르단 남부에 위치한 고대도시로 3,000년 전 나바테아인(Nabataean)이 이곳에 거주하며 암석을 파서 건축물을 만들어내고, 교역을 했다고 한다. 특히 알카즈네(Al Khazneh)라고 불리는 보물창고는 페트라를 방문하는 사람들이 꼭 보고 싶어 하는 곳 중 하나다. 꼭대기에는 알 데이르(Al Deir)라 불리는 수도원이 있다. 800개 이상의 계단을 올라가야만 볼 수 있는데 왕복 4시간 소요된다고 한다.*
본격적으로 페트라 모험을 시작하기 전 문제가 생겼다. 우리는 와디럼과 아카바에서 숙박을 할 계획으로 배낭과 캐리어를 챙겼는데 페트라 주변에는 물품보관함이 없다. 페트라 내 호텔 숙박 예정이라면 숙소에 짐 보관을 할 수 있으니 걱정 마시라. 이 걱정은 '어떻게든 되겠지.'하고 온 무계획자인 나에게 해당하는 이야기니. 택시를 타고 숙소를 가야 하는 사람이라면 택시와흥정할 힘을 아끼고 페트라 정상 가는 데 쓰자. 요르단에서 우버를 이용할 수 있는 곳은 암만(퀸알리아 국제공항 제외) 뿐이라 우버도 못 부르고 호텔이 500m 거리에 있다 하더라도 기본 3JD는 지불해야 한다. 그냥 지불하자. 만약 이런 실랑이를 피하고 싶다면 페트라 입구 인근 숙소에 예약하는 것이 좋다.
예상치도 못한 난관에 부딪힌 나는 급히 현지인 친구 S에게 전화를 했다. S는인근 매장에 들어가서 매장주와 통화를 하게 해달라고 했다. 그 말에 따라 정말 아무 가게에 들어가 휴대폰을 주고 통화를 요청했다. 다짜고짜 휴대폰 들이대는 외국인의 행동에 당황했을 법도 한데 매장 사장님은 흔쾌히 짐을 맡아주었다. 우리는 가벼워진 몸으로 입장권을 발급받으러 페트라 방문자 센터로 갔다.
요르단에 여행 오면서 요르단 패스(Jordan Pass)를 구매하지 않는 사람이 없길 바란다. 페트라 1일 낮 입장료는 50JD(약 10만 원)지만 요르단 패스 소지자는 페트라 포함 대부분의 관광지 무료입장이 가능하다**. 요르단 현지인 평균 월급이 543JD인데 페트라 입장료가 50JD라니 말이 돼?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현지인이나 나처럼 요르단 거주증(이까마, Iqama)을 소지하고 있다면 단 돈 1JD(약 2,000원)만 지불하면 된다. 우리나라에서 각 지역 도민이 지역 관광지 입장료 할인받는 것과 같다. 할인 혜택이 말도 안 되게 클 뿐. 그 말도 안 되게 큰 혜택을 반 요르단인으로 인정받은 내가 받았다. 친구들은 요르단 패스를, 나는 요르단 거주증을 보여주고 입장권을 받았다. 드디어 페트라에 간다!
페트라 입구에는 그늘이 없다. 입구에만 없는 것이 아니라 그 어느 곳에도 없다. 한참 가야 있는 님파에움(Nymphaeum)이라는 곳에만 나무가 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고대에는 이곳에 나무를 비롯한 초록 풀이 무성했었기를 바란다. 그렇지 않으면 나바테안인들이 너무 힘들었을 테니까. 입장료 구매처에는 단거리 말타기 체험이 무료라고 쓰여있지만 그건 거짓이다. 알아두시라, 페트라에는 무료가 없다. 말 소유주들은 "무료 말타기 체험 하세요!"를 외치며 관광객을 꼬드기는데 '단거리'만 무료일 것이고 끝가지 체험한다면 유료다. 그들의 말을 믿고 말을 탔다면 흥정을 해서 인당 최소 2JD, 최대 10JD까지도 지불할 수 있으니 조심하자. 흥정 후 돈을 지불할 때도 지불 금액만 딱 내도록 하자.
말타기 체험 후 팁으로 실랑이를 하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쭉 걷다 보면 이국적인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페트라에는 특이한 색을 가진 암석 계곡이 있는데 한 번도 보지 못한 자연물이라 "와..."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그저 돌일 뿐인데도 만져도 보았다. 그런 곳에서 익숙한 단어를 찾았다. 바로 관광 안내판에 새겨진 HYUNDAI(현대). 현대자동차가 유엔개발계획(UNDP)과 협력하여 페트라 지역 경제 활성화에 힘쓰고 있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게 되었다.
"와..."의 절정은 페트라의 보물 창고라고 불리는 알 카즈네(Al Khazneh)가 나오는 계곡의 끝(이자 페트라 여정의 시작). 이전의 거리는 절벽이 있어도 널찍했는데 알 카즈네 입구 쪽은 다소 좁다. 아무래도 절벽 쪽엔 볕이 들지 않아 빼꼼 보이는 알 카즈네 쪽만 밝게 보였는데 가까워질수록 우리 모두 "와..."하고 감탄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안에 들어가서 유물을 볼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형형색색 옷을 입은 낙타와 너무 잘 어울리는 유적이었다. 1초 전만 해도 사진을 찍어 주겠다면서 따라다니던 수십 명의 꼬맹이 때문에 짜증 났었는데 화가 싹 가라앉았다. 아니, 언제 화가 났냐는 듯 유적지에 대한 경이로움만 남았다.
페트라에서 사진 찍기 좋은 장소가 몇 군데 있는데 거의 유료다. 가격도 천차만별이라 누구는 2JD, 누구는 10JD를 지불할 수도 있다. 우선 페트라를 등지고 서서 오른쪽과 왼쪽에 인스타그램 사진 맛집이 있다. 오른쪽 절벽은 왼쪽 절벽보다 사진 촬영비가 비싼데 그건 인스타그램에서 'Petra'를 검색해서 사진을 보면 이유를 알 수 있다. 우리가 찾아보지 않더라도 직원이 왼쪽과 오른쪽 절벽 사진 차이를 보여준다. 우리는 조금 비싸더라도 오른쪽 절벽을 택하고 흥정을 시작했다. 사진을 찍어주고 차 한 잔 마시고 5JD라는데 인당 만 원은 조금 비싸다. 베두인도 흥정할 것을 생각하고 부른 값이니 셋이 10JD까지 흥정해 보자.(나중에 프랑스인 친구와 셋이 갔을 때는 셋이 5JD를 지불했다.)
흥정을 잘했다며 기분 좋게 사진과 영상을 잔뜩 찍고 내려왔는데 '페트라를 내려다보는 절벽에 올라가는 것은 무료'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바로 옆에 경찰이 보여서 "우리 여기 돈 내고 올라가야 한다 해서 돈 냈는데 이건 뭐예요."라며 얘기해 보지만 페트라는 베두인(이라는데 현지인은 베두인도 아니라고 한다) 치외법권 지역인지라 경찰도 어깨만 으쓱하며 알아서 하란 듯 내쫓는다. 어차피 돌려받을 수 있는 돈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아 알 카즈네를 지나 왕가의 무덤 쪽을 둘러보고 나왔다.
요르단은 정말 알쏭달쏭한 나라다. 규칙도 규정도 다 무시하는 것 같은데 자기들만의 약속이 있다. 물론 관광객인 우리는 그 약속이 뭔지 모르니 이해되지 않는 규정에 따라 돈만 지불하면 된다.
*만약 페트라를 당일치기로 방문한다면 서둘러야 할 수 있다. 암만행 버스는 오후 5시에 한 대 있는데 수도원까지 정말 쉬지 않고 가야 4시간이다. 이날은 와디럼행 기사 서비스를 예약해 둬서 원형극장과 무덤만 둘러보고 내려왔는데도 천천히 움직이니 5시간 걸렸다. 다음번 프랑스인 친구들과 재방문했는데 수도원 찍고 다른 경로로 내려왔더니 7시간 소요됐다. 수도원만 빠르게 찍고 오는 경우 큰 문제는 없겠지만 다른 경로로 내려온다면 서두를 것.
**페트라를 구석구석을 살펴보고 싶다면 두 번, 세 번 방문이 필수. 요르단 패스 구매 시 페트라 2일권, 3일권을 선택해서 구매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