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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이릿 Mar 08. 2024

내 남편 후보들은 모두 요르단에 있었다

또 기혼 여성으로 둔갑했다

  2012년도부터 해외여행을 다니기 시작했는데 한국인으로서 여행하기 꽤 편해졌다고 느낀 건 2010년 후반부터였다. 2012년 첫 해외여행지인 파리 샤르드골 공항에 도착해서 '파리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Bienvenue a Paris)' 문구를 보고 첫 해외여행의 감상에 젖기도 전 외국인 두 명이 다가와서 한국인이냐고 물어 그렇다고 답했더니 갑자기 내 앞에서 남자 아이돌 노래를 부르며 춤을 췄다. 박수는 쳐줬지만 여행의 시작이 당황스러웠다. 2015년 다시 프랑스, 한-불 수교 130주년을 계기로 전에 비해 더 많은 한국 관련 행사가 열렸다. 또한 한국 가수의 인기와 한국 문화 행사를 찾는 사람도 많아졌다. 이제 한국인이라고 했을 때 "남한? 북한?"이라는 말도 덜 듣게 되었다.


  이번엔 유럽이 아닌 2022년과 2023년의 요르단. 번화가인 임시 숙소에서 퇴근 후 산책과 저녁을 사 먹기 위해 돌아다니면 한국인이냐고 물어보고 갑자기 한국 드라마나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사람이 꽤 있다. 주거단지인 압둔 근처로 이사 후 공원에서 회사분과 산책 중에 갑자기 손가락 하트를 날리고, 한국어로 "이뻐요!"라며 소리치는 학생들도 꽤 있었다. 내 옆의 키 크고 귀엽게 생긴 회사분에게 하는 말 같지만 무튼 한국인을 좋게 보는 사람들이 늘은 것만은 확실했다. 손가락하트에 한국말이라니. 예전과 확연히 차이나는 한국인 대우.


  귀엽고 사랑스러운 사람만 만났으면 이 글이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요르단에서 안전하게 지내는 비법서(여자편)'이 있다면 거기에는 '택시 기사나 남자들과 대화하지 않기'가 적혀있을 것이다. 요르단 생활과 업무에 적응하기 바쁜데 그 와중에 아랍 문화의 모든 것이 새롭고, 이쁘고 귀엽다고 해주는 귀여운 히잡 쓴 여자들의 사탕발림에 절여진 나는 모든 이들에게 친절했다. 물론 예외는 존재했다. 출퇴근 또는 외출 시 꼭 만날 수밖에 없는 택시 기사가 그 예외에 속했다. 웃음기 싹 빼고 최대한 무표정으로 대하기. 그러나 그들은 요르단에서 흔히 보기 힘든 외형을 가진 아시안 여성 그리고 한국인에게 궁금한 게 많아 꼭 말을 건다. 보통 이런 식이다.


  "어디서 왔어요?"

  "한국이요."

  "뭐 하러 왔어요? 남자친구 아니면 남편 따라왔어요?*"

  "일하러 왔어요. 그리고 싱글입니다만."

  "몇 살인데 결혼을 안 했어요. 저 아는 사람 있는데 집도 있고 어디에서 일하고~ (중략) 만나 볼래요?"

  "아뇨(정색)."

  "결혼도 안 했다면서 한 번 만나보지 그래요."


  한국인에 대한 인식이 좋아진 거라 생각했고, 짜증 나게 하는 사람 한 명 때문에 다수에게 방어태세를 갖추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택시를 5번 타면 2명 이상의 기사가 비슷한 주제의 대화를 시도하며 내 손가락을 본다거나 얼굴을 쓱 본다. 귀여운 여학생들도 아니고 턱수염 수북한 아저씨들이 그러니 유쾌하지 않더라. 잘생긴 사람이 그래도 기분 좋을 일은 아니다. 여러 명의 가상 남친을 소개 받다 지쳐 결국 요르단 거주 햇수가 오래된 회사 분에게 하소연을 했는데 내 이야기를 듣고 문제의 원인을 바로 찾아주었다.


  "아이릿씨, 택시 기사 하는 말에 다 답해줘요?"
  "네."

  "그러니까 그렇죠. 그냥 창문 보고 무시해요."

  "어른들이 말 거는데 어떻게 무시해요... 그래도 평소보단 웃진 않는데..."


  회사 상사는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며 '헛소리 방어 스킬'을 알려 주었다. 역시 '요르단에서 안전하게 지내는 비법서(여자편)'은 존재했다! 첫 장은 택시 탈 때 편으로 시작해 보자. 첫째, 택시 앞 좌석에 타지 말 것. 둘째, 택시기사가 묻는 말은 필요한 거 아니면 무시할 것. 마지막 셋째, 웃어주지 말 것. 이야기하면서 자연스럽게 미소정도는 띨 수 있는 거 아닌가 했는데 "괜한 오해를 받고 싶지 않다면 친근하게 대하지 않는 것이 좋아요."라며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습관은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인간 대 인간으로 다정함을 장착하여 30년을 그렇게 살아왔는데 어떻게 손바닥 뒤집듯 바꿀 수 있을까. 조금 힘들었지만 '웃지 않고' 택시를 타서 그냥 창 밖만 멍하게 쳐다보니 말을 거는 기사가 확실히 줄었다. 그러다 관성의 법칙에 따라 다시 '웃으며' 인사를 건네며 택시를 탔는데 역시나 또 비슷한 일이 발생했다. 그 덕에 손바닥을 뒤집고, 관성을 거슬러 회사 상사분의 말을 따를 수 있었다.


  요르단 생활 4개월 차에 접어들었을 땐 택시기사가 던지는 결혼, 연애 질문정도는 가볍게 튕겨낼 수 있게 되었다. 자주 가는 길거리 음식집도 생겼고, 무례한 상대에게 웃으며 엿먹이는 방법도 익혔다. 그러나 관성을 거스르기는 힘들어 여전히 마음이 편안해졌을 때는 자연스레 웃으며 대화를 나누다 당한다. 조금 여유로워졌을 때 일은 발생한다. 새롭게 찾은 새로운 튀르키예 음식 맛집에서 케밥을 사서 먹고 있는데 직원이 "저 한국인이랑 결혼했어요. 한국여자가 좋아요."라며 말을 걸었다. 이미 케밥을 크게 한 입 베어 물어 말을 할 수 없어 '그 여자분은 무슬림이려나' 생각하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엄지 치켜든 뒤 미리 불러둔 택시가 와서 자리를 떴다.


  회사 상사와 케밥을 먹으러 다시 방문했다. 한국인이랑 결혼했다던 그 직원이 매대를 지키고 있었다. 사장님을 보며 "너무 맛있어서 지인 데리고 하루 만에 또 왔어요!"라며 너스레를 떨고 음식을 주문했다. 상사한테 이 집 음식이 어떻게 맛있다~라며 맛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갑자기 직원이 "저 한국인 여자랑 결혼했어요. 한국인 이뻐요. 좋아요."라며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지난번에도 그러더니 또 그러네 싶어서 (뭘 축하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축하한다고 말해줬는데 상사의 표정의 이상했다. 왜 그러시냐 물어보니 "저 직원 아이릿씨한테 작업 거는 것 같은데요? 영어가 어눌해서 의사 전달이 잘 안 된 것 같은데..."라며 설명을 해주었다.


  '설마'하는 마음에 "부인 좋아요?"하고 물어보니 부인이 없다 한다. 그 직원은 한국인 여성과 결혼을 한 것이 아니라 '하고 싶은' 것이었다. 그 대상은 나였다. 나는 한국인이 좋고, 한국 여자랑 결혼하고 싶다는 사람한테 긍정의 표현으로 보일 수 있게 고개를 끄덕인 데다가 그런 말을 듣고 하루 만에 친구 데리고 재방문한 사람이 되었다. '아니겠지' 하는 표정으로 상사를 바라보고 직원을 바라봤는데 어쩐지 눈빛이 달리 보인다. 직원이 내 결혼 유무를 물었다. 나는 장신구 하나 착용하지 않은 왼손을 들어 오른손으로 약지를 가리다시피 하며 가리키며 "남편 있어요."하고 때마침 나온 케밥을 챙겨 가게를 벗어났다. 그렇게 또 단골 가게가 될 수 있는 곳을 잃었다.


  그 후 남편이 있는 척을 여러 번 더 했다. 남편이 있는데 반지가 없냐는 말도 들었지만 당당히 나갔다. 요르단에서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무뚝뚝하게 대응하는 것이 익숙해져 쉬이 말을 거는 사람도 줄었다. 말 거는 사람이 줄어 편했지만 인간적인 교류가 막혀서 아쉽기도 했다. '여러분이 보는 한국인이랑 다르게 생겼는데! 대한민국 평균 키에 얼굴 크고 무쌍에 피부만 좀 밝은 편인데. 세상 만만하고 맹하게 생겨서 사기 치기 좋아보여서 그러시나요. 그냥 여자면 다 좋은 건가요!' 속으로 외치기도 했다. 만만해 보이면 '어떤 말이라도 해도 괜찮은 상대'로 받아들이는지 답답했다. 그래도 어쩌나, 여기선 이렇게 사는 게 신상에 좋다는데 그렇게 살아야지. 한국인이라서 행복하고 한국인이라서 힘들었다.


  남자를 소개받는 일이 초반에 비해 줄었어도 1년 동안 남자친구와 남편을 만날 기회를 한국에서보다 더 많이 얻었다. 기혼 여성이라 말하면서 모든 기회를 날리면서 살았지만 한국에서는 겪어보지 못했던 새로운 경험이었다. 여전히 궁금하다. 나한테 왜...?



*요르단에서 의아했던 것 중 하나. 여행사에 여행 상품을 문의하고 예산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면 아주 간혹 남편한테 확인해 보라고 묻는다. 여행사에 문의하는데도 여권이 있는지도 묻더라. 문화차이인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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